[한국 기업史 명장면 10]
2010년 11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보도하며 이 같은 제목을 뽑았다. 1945년 광복 이후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나라가 70년 만에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이 성장을 이끈 주역은 기업이었다. 광복 직후 맨주먹으로 시작해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 1980년대의 정치 불안정, 1990년대의 외환위기 등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한국 기업들의 ‘70년 명장면’을 꼽았다. 》
○ 광복, 전쟁, 그리고 성장
현재는 세계 제일의 전자기업으로 도약한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정미소와 양조장, 무역을 하는 삼성상회를 운영했다. 6·25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피란지 부산에서 고철과 탄피를 수출하고 의약품과 생필품을 수입하는 무역에 뛰어들어 큰 수익을 올렸다. 이어 제당, 모직 등 ‘제조업’이라는 새 길을 택했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고향 진주에서 포목상과 식료품점을 하다 부산에서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차려 화장품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화장품은 용기 뚜껑이 잘 깨져 반품 소동이 자주 있었다. 깨지지 않는 소재를 찾다 플라스틱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95년 ‘LG’ 브랜드 출범 후 지속적 성장을 일궈냈다. 1994년 30조 원대이던 매출은 지난해 5배로 늘어난 150조 원대가 됐다.
GS라는 이름은 한국 기업사에서 2004년 7월에서야 탄생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LG와 함께한다. 락희화학공업사는 구인회 씨와 허만정 씨가 함께 세웠기 때문. 그 후 두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이 60년 가까이 이어졌고 GS가 2005년 LG에서 계열 분리하면서 이별했다. 그 당시 지분 등을 둘러싼 잡음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한편 광복 직후 중국 톈진(天津), 다롄(大連) 등지의 중국 상인들이 일본군이 버리고 간 농산물과 화공약품, 공산품 등을 인천에 가져와 팔았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광복 후 트럭을 한 대 구입해 인천에 ‘한진상사’란 운송 겸 무역회사를 차리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육상과 해상 운송으로 폭을 넓혔다. 급기야 1969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고 항공운송업에까지 진출하면서 육해공 전방위 물류전문 기업으로 거듭났다.
1960년대가 경공업 시대라면 70년대는 중화학공업의 시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을 결심하고 1971년 11월부터 국산 병기 개발에 나섰다. 이때 성장한 기업이 한화다. 이에 앞서 한화그룹의 창업주 김종희 회장은 1958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다. 다이너마이트 국산화는 폐허가 된 국토의 전후 재건사업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각종 항만 도로 대교 건설 등에 큰 공헌을 했다.
또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 개발 5대 전략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1970년 포항제철소를 착공했다. 포항제철소 건립으로 대한민국 전체에 좋은 품질의 철강재를 공급하면서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제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1967년 12월 정부가 현대에 자동차산업 진출을 허가하면서부터 현대는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다. 그 후 1976년 2월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가 탄생한다. 포니는 해외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세계 5위의 자동차업체로 일어선 현대자동차는 역사적 명장면으로 2010년 현대제철의 당진제철소가 가동된 것을 꼽고 있다. 이 덕분에 현대차는 전 세계 완성차 업체로는 유일하게 철판 생산에서 완성차 생산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룰 수 있었다.
○ 미지의 길, IT에 도전하다
직물과 석유화학을 주업종으로 하던 SK는 정보통신 분야를 차세대 성장사업으로 정했다. 1994년 민영화 대상이던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 원에 인수했다.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방식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SK그룹은 “미지의 기술에 도전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한 모험이었고 이를 통해 얻은 자신감이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KT는 원래 당시 체신부의 일부분이었다가 1981년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로 정부에서 분리됐다. 1970년대 극심한 전화 적체현상을 보인 유선전화는 80년대 중반 국산 전전자(全電子)교환기 TDX의 개발로 대규모 전화 보급이 가능해지면서 1996년 100명당 전화 보급률 42.7명으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하게 됐다. TDX 개발은 당시 미국, 영국 등 통신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10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