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경제부 차장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사업을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재무와 회계는 참 탄탄해. 지배구조가 좀 그래서 그렇지….”
20대에 89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는 “빚은 몸에서 나는 열과 같다. 지나치면 좋지 않다”며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기업을 공개하는 것도 꺼렸다. 외환위기로 문어발 확장을 했던 대기업들이 나가떨어질 때도 내실을 강조하던 롯데는 건재했다. “고객한테나 잘하라”는 그의 소신 덕택에 롯데의 전문경영인이나 자녀들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었다. 최근 ‘일족의 난(亂)’이 터지기 전까지는.
가족 간 분쟁은 가족기업이 커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성장통’일 수 있다.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너무 오래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몸집은 커 가는데 여전히 꽉 끼는 아이의 옷을 입고 있다 보니 한국 대기업 40곳 중 18곳이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는 조사도 있다. 한국 기업의 오너들은 회사를 단기간에 키우는 과정에서 순환출자 등을 통해 적은 지분으로 회사를 소유한다는 태생적 약점도 있다. 2, 3세로의 상속 과정에서 지분이 낮아져 경영권 위협을 받거나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 승계의 유혹에 빠진다. 서구 기업처럼 공익법인에 지분을 넘기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식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도 공익법인 출연 지분 제한(재단에 증여하는 지분에 대해 최대 10%까지만 증여세 면제) 규정에 막혀 쉽지 않다. 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는 “취약한 지배구조를 정리하는 데 열중하다 보니 새로운 사업이나 시장 개척 같은 본연의 경영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한국 대기업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롯데가의 혈투에 혀만 끌끌 찰 게 아니라 이참에 가족기업의 승계에 대한 철학과 원칙을 점검하고 제도적 지원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가족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소유에 대한 집착은 가족기업 분쟁의 불씨다. 가족경영 전문가들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자식도 기업가의 자질을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부모의 착각일 뿐이라고 말한다. 창업주의 투철한 기업가정신을 물려받지 못한 유전자 운이 없는 후손도 많다. 창업주가 가업 승계의 원칙을 세우고 후계자 육성, 전문경영인과의 역할 분담, 가족 갈등을 중재할 신뢰할 만한 외부 인사 확보 등의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그 자신이 회사를 무너뜨리는 파괴자가 될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사업을 키울 정도로 수완이 좋은 롯데의 신 창업주도 ‘창업자 리스크’를 피하지 못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 일가가 여론에 둔감한 건 가족 갈등을 중재하고 기업을 보호할 전문경영인이나 외부 인사가 없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롯데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고위 관료 출신의 A 씨는 롯데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들에게 “나는 이미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선을 딱 그었다고 한다.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고 한 해 2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알짜 면세점 매장을 닫을지도 모르는 위기에서도 롯데 일가가 싸움을 멈추지 못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500여 개 기업을 세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시부사와 에이치는 기업가의 자세로 ‘논어(기업 철학과 도덕)와 주판(경제적 가치)의 일치’를 강조했다. 일본에서 사업을 배우고 시작한 신 창업주의 주판 실력은 누구보다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건강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기 위한 ‘논어 읽기’는 그만 못했던 것 같다. 롯데 신 창업주뿐일까. 롯데를 비난하긴 쉬워도 내 회사가 ‘제2의 롯데’가 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은 간단치 않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