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한국 기업史 명장면 10]<1>삼성 1993년 신경영 선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로 삼성 임원진들을 긴급 소집해 자신의 신경영 구상을 밝히는 모습. 삼성그룹 제공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서울 비서실로 전화를 건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현 삼성전자 회장)의 불호령에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가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이 회장이 그토록 화가 난 건 삼성 사내방송인 SBC의 한 고발 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방송에는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조립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삼성 사내방송 SBC의 한 고발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불량 세탁기 조립 모습. 라인 작업자가 칼로 불량인 부품을 깎아내 대충 조립하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이다”라고 지적한 적도 있고 “삼성은 3만 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적인 집단”이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신경영 선언이 나오기 1년여 전인 199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삼성은 1986년 이미 망한 회사”라며 “우리 제품은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아직 멀었다. 2등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혹독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15만 명이 넘는 거대한 조직을 단숨에 바꾸긴 쉽지 않았다.
1993년 6월 4일 이 회장은 일본 도쿄(東京) 오쿠라호텔에서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과 함께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회의를 벌였다. 후쿠다 고문은 당시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목한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도쿄를 떠난 비행기 안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몇 번이고 정독한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순간 보고된 불량 세탁기 고발 프로그램이 그를 다시 한번 격노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그해 8월 초까지 스위스 로잔, 영국 런던, 일본 도쿄로 이동하며 주요 사장단과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1800여 명을 대상으로 ‘신경영’ 특강을 이어갔다.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 시간은 350시간, 이를 풀어 쓰면 A4용지 8500장에 이른다. 당시 이사였던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서운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이 회장 말씀을 들을수록 그 위기감이 절절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합니다. …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초일류 기업을 향한 첫발을 내딛고 다시 한 번 힘차게 나아갑시다.”
2013년 6월 7일 신경영 선언 20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회장이 전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다. 삼성의 신경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