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걸쳐 국보급 문화재 지킨 간송 전형필 일가
《 삼대(三代)는 우직했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만석꾼은 사재(私財)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했다. 문화재 약탈이 횡행했던 일제강점기였다. 때로는 금싸라기 땅까지 팔았다. 지킬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들면 기와집 수백 채 값을 선뜻 내놓아 훈민정음 해례본부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을 지켜냈다. 어렵사리 이 땅에 남게 된 문화재 일부는 훗날 대한민국의 국보(12점)와 보물(10점)이 됐다. 만석꾼의 아들은 미국에서 촉망받는 화가였다. ‘코리아’라고 하면 한국전쟁 정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서둘러 귀국했고 부친의 호를 딴 미술관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손자의 꿈은 역사가였다. 이젠 연로한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뜻을 계속 받드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아버지를 도우러 뛰어들었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일가 얘기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간송의 아들과 손자를 만나봤다. 이들은 성우 씨(81)와 인건 씨(44)로 각각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이사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
간송 전형필의 아들인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나는) 아버지가 일생을 걸고 수집한 문화재를 지키는 ‘곳간지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말은)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그러던 중 1962년 청천벽력 같은 편지를 받았다. 간송이 석 달 전 급성신우염으로 타계했다는 내용. 아들의 성공을 기뻐했던 간송은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작품 활동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간송은 문화재 수집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언반구 않으셨어요.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이세요. 다만 밤에 족자를 벽에 걸어놓고 보고 있거나 고려청자를 어루만지고 계셨던 게 기억나요.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가 저렇게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죠.”
전 이사장은 성인이 돼서야 간송이 힘겹게 문화재를 수집한 걸 알게 됐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문화재 수집은 재산과 안목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기개가 필요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표적이다.
“조선어 교육 금지령 등 문화말살 정책을 폈던 일제는 ‘한글이 몽골 문자를 본 떴다’는 등 한글을폄훼했지만 반박할 증거가 없었어요. 한글 창제원리가 실린 해례본은 어디에도 없었죠.”
미국에서의 작품활동을 접고 귀국한 전 이사장은 간송이 세운 미술관인 ‘보화각’을 열어보고 말문이 막혔다. ‘빛나는 보물을 모아뒀다’는 이름이 무색하게 폐허로 변해 있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과 중공군, 터키군 등이 거쳐간 탓. 문화재를 뺏기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미술관 복원이 급선무였다.
전 이사장은 1966년 동생인 전영우 씨(현 간송미술관장·전 상명대 미대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워 수집품을 상세히 정리하는 등 문화재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참여했던 손꼽히는 고미술학자들은 ‘간송학파’로 불린다. 1971년부터는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바꾸고 매년 봄, 가을에 2주씩 꼬박꼬박 공개했다. 무료였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문화재가 손상되지 않도록 유지, 보수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당연히 무료로 공개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다만 우리 덩치를 감안해 능력껏 하자는 뜻에서 한시 개방했죠.”
‘간송 정신’을 더 널리 알리고 있는 간송의 장손 전인건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이 현재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의 할아버지 사진 곁에 섰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그는 지난해 3월부터 전시 공간을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옮겼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건축한 현대적인 건축물에 고미술을 전시하는 게 적합한지 등에 한때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간송의 수집품을 보고 싶은 이들은 언제든 와서 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30만여 명이 다녀갔다.
현재 열리는 ‘간송문화전: 매·난·국·죽 선비의 향기’에서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의 ‘풍죽(風竹)’ 전시실에 들어서면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대숲 영상이 펼쳐진다. 미디어아티스트 차동훈 씨(31)가 제작한 ‘풍죽예찬’으로 관람객들은 4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탄은이 대나무를 보면서 느꼈을 법한 감흥을 짐작할 수 있다.
“풍죽의 잎들은 거센 바람에 누워 있지만 나무만큼은 잔가지조차 꺾이지 않고 있어요. 세파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해 조선시대 묵죽화의 백미로 꼽히죠. 그림만 덜렁 걸려 있으면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관심 있어 하고 편안해 하잖아요.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친숙하게 전하려는 시도입니다.”
대기업의 초고화질(UHD) TV를 활용해 그림을 교육하는 것도 같은 시도다. 정교하게 그리기로 유명한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근접 촬영을 통해 UHD로 보여줘 붓의 필치와 화려한 색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미술 감정가들이 돋보기로 들여다봤던 것과 비슷한 원리다. 또 작품을 포털에 전시하거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군자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간송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지켜낸 해례본의 영인본(影印本)을 교보문고와 함께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원본을 최대한 구현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에 각 가정이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광복 70주년인 올해 한글날 공개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컨설턴트 출신인 동생 전인석 씨(41)도 참여한다. 해석본도 덧붙일 계획이다. 원로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감수를 맡았다.
“미국에는 독립선언서 사본을 거실에 걸어둔 가정이 종종 있어요. 독일의 몇몇 가정도 구텐베르크 성경 사본을 갖고 있죠. 서양 최초의 금속 인쇄기술에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죠. 한글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이 온전히 집결된 문화재 아닙니까.”
미래 우리 문화에 자부심 느꼈으면
현재 간송미술관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양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힌다. 다만 간송미술관은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지원을 받는 리움과 형편이 다르다. 실제로 간송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빚쟁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후손들은 그제야 간송이 빚까지 내서 각종 세금을 냈던 걸 알게 됐고 결국 서울 종로의 생가를 팔아 빚을 갚았다.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문화재에 어떻게 가격을 매기겠습니까. 역설적이지만 아버님(간송)이 진짜 멋있게 (돈을) 쓰고 가셨어요. 엄청난 일을 하셨던 거죠.”(전 이사장)
“신라 말의 금속 공예기술은 최고였어요. 청자는 중국에서 유래했지만 고려 상감청자나 비색청자는 세계 최고로 꼽히죠.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오지 않았나요. 훌륭한 문화를 만들어 낸 우리 조상의 유전자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자긍심과 자부심, 자신감을 후대가 갖기를 간송이 바라고 있지 않을까요.”(전 사무국장)
간송의 후손들은 여전히 ‘간송 정신’의 실천을 고심하고 있다. 이들은 대구 간송미술관 분원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간송미술관 인근에 규모를 넓힌 상설미술관을 마련하는 방안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사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지원 등이 여전히 미비해 어려움을 겪는다. 당장은 후원회 모집에 주력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후원회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올해 6월 후원회 발족식을 열었고 연내 개인회원을 모집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간송미술관의 종이 한 장도 팔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삼대가 우공(愚公) 같다’고 하니 전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버님이 모은 수집품을 지킨 ‘곳간지기’일 뿐이에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정신’을 더 알리는 건 후대가 반드시 해줬으면 해요. 저는 곧 갈 거예요. 나이도 많이 먹었고…. 다만 제가 간송을 (저승에서) 만나 뵙고는 야단맞고 싶지 않을 뿐이죠.”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겨 버린 아들의 눈은 어느새 벌게져 있었다.
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