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디아스포라/세계로 흩어진 동포들]<3>카자흐스탄의 10만 고려인
카자흐스탄 타라즈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 최유리 씨(67). 그의 부모는 밤낮 없이 집단농장에서 양파, 수박을 재배하는 농사일을 했다. 차별도 이어졌다. 같은 동네로 강제 이주된 독일인은 한인을 놀렸다. “고려인은 개고기를 먹는 민족이지?” “키도 작고 눈도 째졌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남에게 지기 싫다는 생각에 주먹다짐을 벌이곤 했다. 그러다 복싱에 입문한 그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됐다. 차별 때문에 다른 민족을 부러워하던 생각이 완전히 바뀐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옛 소련팀 복싱 코치로 방문한 한국은 ‘고려인’으로 멸시받던 그 나라가 아니었다. 1990년부터 2년간 한국팀 복싱 코치로 일한 그는 한국의 발전상을 ‘카자흐스탄 드림’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그의 명함은 ‘최유리 카자흐스탄 카스피그룹 회장’. 스포츠에서 사업으로, 사업에서 사회활동으로, 사회활동에서 정치로 도전 범위를 넓혀 왔다.
지난달 30일 카자흐스탄 고려인 여성합창단원 10명이 고려인협회 아스타나 지부에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2000년 결성돼 한국 민요와 대중가요를 불러온 이 합창단은 15일 KBS가 주최하는 국민대합창 행사에 참여한다. 아스타나=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따라 옛 소련 동쪽 끝에 살던 한민족 17만여 명은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이들을 짓누르던 생활고는 한동안 조국을 잊게 만들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0년 한-소 수교는 고려인들이 ‘핏줄’을 찾게 된 계기였다. 노숙자가 넘쳐나고 시위가 만연한 사회로만 그려지던 한국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베일을 벗고 성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옛 소련 붕괴와 맞물려 1990년에 카자흐스탄 고려인문화센터협회(현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발족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이 무렵 강제이주를 당했던 다른 민족들도 카자흐스탄 엑소더스(탈출) 현상이 두드러졌다. 카자흐스탄의 미래가 어두웠기 때문이다. 1989년과 1999년 인구 통계를 비교하면 러시아 민족은 174만여 명, 우크라이나 민족은 34만여 명이 각각 줄었다. 고려인은 달랐다. 10만여 명 중 3000명 남짓 감소하는 데 그쳤다. 최 회장은 “카자흐스탄은 나라를 떠나지 않고 근면하게 일한 고려인을 무한히 신뢰했다”며 “그것이 현재 카자흐스탄 고려인이 성공한 바탕”이라고 말했다.
○ 유라시아 진출의 발판인 차세대 고려인
풍부한 자원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카자흐스탄은 독립국가연합(CIS), 중국 진출의 베이스캠프로 떠오르고 있다. 10만 명에 이르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전체 인구(1815만 명)의 0.55%에 불과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계에서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는 이런 입지를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고려인 조직을 구상 중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일체감을 높인 뒤 고국과 연계를 강화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걸림돌도 많다. 고려인협회장을 14년째 맡고 있는 김 로만 하원의원(60)은 한국이 카자흐스탄의 변화를 제대로 몰라주고 활용하지 못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알마티에서 만난 김 의원은 “이곳 하원의원들과 3년 전 방한해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높은 기술력을 갖춘 한국이 카자흐스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러 와 달라’고 몇 차례나 초청했지만 3년째 묵묵부답”이라고 말했다.
자칫 이런 흐름이 차세대 고려인과 한국과의 단절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심지어 “4세대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사람들보다도 한국을 모른다”는 세대 변화의 파장도 나타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희생양이던 고려인. 역사의 치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고국의 관심만큼 큰 위안은 없는 셈이다. 현지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의 잠재력과 한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협력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차세대 고려인 육성 사업, 한글학교 교사 초청 연수 등 지원을 펼쳐온 재외동포재단은 “고려인 다기능 거점공간 건립, 동포언론인 모국연수 실시 등 한민족 정체성을 이어나갈 사업 확대를 위해 2016년 특별지원 예산 20억 원 편성을 정부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일성 비판 연루돼 망명 김종훈씨 “남북통일만이 치유 받는 길”
1957년 옛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선유학생 대회에서 모스크바국립대 학생이던 허진이 이같이 연설했다. 그 순간. 대학 후배였던 김종훈 씨(83·사진)는 더 이상 고향 황해도 장연군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진 분위기에서 한 얘기였지만 북한 노동당은 즉시 허진과 가깝던 국비장학생 9명에게도 공동 책임을 물었다.
그 길로 기숙사를 뛰쳐나온 이들은 모스크바 외곽에 숨어 망명을 신청했다. 옛 소련은 이들 10명의 망명을 받아주는 대신 전역으로 흩어 놓았다. 김 씨는 “일본 국민으로 태어나 이내 해방을 맞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국적인 상태로 시베리아를 떠돌았다”고 기구한 인생역정을 전했다.
김 씨는 1967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정착했지만 1970년대가 돼서야 소련 공민권을 받았다.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과는 다른 운명의 북한 출신 고려인 1세가 된 것이다.
김 씨는 대개의 고려인처럼 남과 북을 모두 자신의 조국이라 말했다. “북한엔 내 부모의 묘가, 남한엔 월남한 동창생과 친척이 살고 있으니 어느 한 곳도 버릴 수가 없다.”
1998년 주카자흐스탄 북한대사관이 철수한 뒤 친북 고려인들은 자취를 감췄고 친북단체인 카자흐스탄 고려인통일연합회도 해체됐다. 하지만 남한도 북한 엘리트 출신인 김 씨를 동포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김 씨는 이제 “남북통일만이 우리가 치유받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이 바뀌고 남남 갈등이 이어지는 한국의 현실은 그에게 암울했다. 김 씨에겐 시베리아 벌판의 차가운 바람보다 조국의 무관심이 더 시렸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비판했던 10인은 남과 북, 옛 소련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이었다. 8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는 “조국은 왜 우리를 찾아주지 않는가”라고 다시 물어 본다.
▼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묘지엔 수풀만… ▼
홍범도재단 재정문제로 문닫아 계봉우 선생 아들이 힘겹게 관리
1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내 계봉우 선생 묘비 앞에 선 아들 계학림 씨. 크질오르다=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현지 고려인의 기부로 설립된 홍범도재단은 1996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홍범도 장군의 묘지를 이장한 뒤 공원을 조성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곳을 찾는 발길은 뜸해졌다. 대한독립군을 지휘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두산 호랑이’를 기리는 추모지라고 하기엔 초라해 보였다. 강제이주를 당한 뒤 집단농장 관리인과 극장 수위로 일하다 1943년 세상을 떠난 홍범도 장군의 말년을 떠올리게 했다.
1998년에는 민족 계몽과 한글 교육에 평생을 바쳤던 계봉우 선생의 묘지도 이곳으로 이장됐다. 2010년에는 한국 정부와 현지 기업인의 도움을 받아 공원을 재단장했다. 하지만 공원을 관리하던 홍범도재단이 2년 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자 계봉우 선생의 넷째 아들인 계학림 씨가 공원 관리를 떠맡았다.
그와 함께 공원을 방문한 1일은 계봉우 선생 탄생 135주년이었다. 하지만 수풀 사이에 있는 선생의 흉상은 쓸쓸해 보였다. 계 씨는 “한국 정부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아버지께 추서한 건국훈장 독립장이 무색하다”며 한탄했다.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존재가 잊혀질 위기에 처한 셈이다.
계 씨는 “차세대 후손들이 무엇에 기대어 고려인의 정체성을 이어갈지 모르겠다. 꾸준한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토로했다.
알마티·아스타나·크질오르다=차길호 기자 kil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