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사태 계기로 다시 불붙은 ‘국민연금 역할론’
선진국에 비해 관치(官治) 우려가 큰 국내 기업 경영 환경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정부와 정치권의 기업 경영 개입을 정당화하는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 ‘국민연금 역할론’ 재부상
이런 상황에서 롯데가(家)의 분쟁으로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롯데 계열사 주가 하락에 따른 국민연금 손실 우려가 커지자 정치권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강화 요구가 쏟아졌다.
김무성 대표는 7일 롯데 사태와 관련해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켜낼 수 있도록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 주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어 10일에는 새누리당이 국민연금으로부터 주주권 행사 관련 보고를 받았다. 새누리당은 이 자리에서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는 대신 현행법상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소극적 주주권(의결권)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도록 추가 대안을 마련하라며 한발 물러섰다.
○ “자산 운용 제약” vs “주주 행동주의 필요”
정치권이 소극적인 의결권 행사 방침으로 선회한 것은 현행 자본시장법상 주주권을 강화하면 국민연금의 공시 의무가 강화돼 주식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현행법상 단일 기업 지분의 5% 이상을 가진 주주, 10% 이상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는 공시를 해야만 주주총회 소집, 이사 추천·해임 등의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이날 새누리당 보고 자리에서 “법적 규정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경우 빈번한 공시에 따른 포트폴리오 노출과 (일반 투자자들의) 추격 매매 등으로 운용상 심각한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며 난색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등에서는 연기금이 이사회 안건에 찬반표를 던지는 것을 넘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거나 경영 관련 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하며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 “주주권 행사는 정당한 권리”… 폐쇄경영 견제 목소리 높아 ▼
‘국민연금 역할론’ 점화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은 매년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기업 명단을 공개할 정도다.
○ “국민연금 독립성 확보가 선결 조건”
하지만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기업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대기업 견제 수단으로 연기금 주주권 행사 카드를 꺼낸다면 시장경제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앞으로 2500조 원까지 늘어날 텐데 그러면 사실상 국내 모든 대기업의 대주주가 국민연금이 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면 정부가 기업 경영에 개입할 위험성이 커진다”고 꼬집었다. 신석훈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국민연금은 중립적 위치에서 ‘수익성 극대화’라는 본래 목적에 맞춰 운용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임수 imsoo@donga.com·박형준·홍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