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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물고 건넌 태평양… 200만 ‘파워 코리안’으로

입력 | 2015-08-11 03:00:00

[코리안 디아스포라/세계로 흩어진 동포들]<4>역경 딛고 주류 진입한 재미동포




韓美 한마음으로 이뤄낸 ‘교과서 동해병기’ 지난해 5월 미국 버지니아 주의 한 행사장에서 공립학교 교과서 동해 병기 법안 통과를 이뤄낸 한인들이 축하연을 열고 있다. 데이비드 마스든 주 상원의원과 티머시 휴고 주 하원의원 등 법안 통과의 미국 측 주역들이 모두 초대돼 200여 명의 교민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1959년 11월 추운 겨울날 당시 21세의 여이순 씨(77)는 갓 다섯 살 된 딸 평화(미국명 주디 드레이퍼)를 품에 안고 미국으로 향하는 미 해군 함정에 올랐다. 그의 뇌리엔 점점 멀어져 가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20년 추억이 스쳐 갔다.

일제강점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일곱 살이 되던 해 맞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외세에 의한 분단, 그리고 6·25전쟁은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피란길에 가족과 뿔뿔이 헤어진 그는 어린 시절 배운 무용 덕분에 미8군에서 무용수가 됐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두 살 위 흑인 미군 병사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았다. 남편을 따라 태평양을 건넌 지 어언 56년. 현재 텍사스 주에 사는 그는 9일(현지 시간)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에서의 고된 삶은 피란길보다 쉽지 않았다”며 울음을 참지 못했다.

70년 전 광복과 함께 한반도 남쪽에 찾아온 미국. 그들의 도움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미국 이민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미주 한인 이주 역사는 1903년 미국 상선 겔릭 호에 승선한 102명의 한인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됐지만 본격적인 미국 이민사는 광복 이후 막이 올랐다. 1953년 정전 이후 이제는 혈맹(血盟)이 된 미국으로 기회를 찾아 떠나는 한인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주 한인 이민사 연구가인 주동완 씨는 “건국 이후 미주 이민은 미군과의 결혼과 정부의 허락을 받은 유학, 6·25전쟁 당시 전쟁고아의 입양 등 세 가지가 대부분이었다”며 “건국 초기 이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1970년대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태평양을 건넌 대한민국 국민의 미국 이민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태평양 건너 이역만리에서 초기 정착민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여 씨는 도미 후 6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의 새 흑인 남편을 얻었다. 여 씨는 아시아 여성, 흑인의 아내, 혼혈아의 어머니에게 쏟아지는 거센 차별을 견뎌 내야 했다.

“딸 주디에게 ‘남이 잘 때 너는 공부해라. 두 배로 공부해야 성공한다’고 다그쳤어요. 삶이 힘들어도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잊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역경과 고난 속에 미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 간 미주 한인 동포는 지난해 말 현재 224만 명으로 늘어났다. 700만 재외동포의 3분의 1가량이 미국에 살고 있을 정도로 단일 국가로는 중국 다음으로 많은 이민자가 모여 살고 있는 셈이다. 서부의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관할 지역에 가장 많은 55만여 명이 모여 살고, 동부의 뉴욕총영사관 관할 지역에 33만 명이 살고 있다.

교민이 늘어나면서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미국 주류 사회 진출도 늘고 있다. 현재까지 연방 하원의원 1명이 나왔고 지난해 11월 중간선거를 통해 모두 7명의 한인이 주 의회의 상하원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크고 작은 사업을 일으켜 큰돈을 모은 재력가도 많다. 2, 3세 젊은이들은 전문 직업인으로 주류 사회를 파고들고 있다.

미8군 무용수 소녀서… 美판사 키워낸 엄마로 지난해 11월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한국의 날’ 행사에 참석한 여이순 씨와 딸 주디 드레이퍼 판사 부부. 왼쪽부터 여 씨의 남편 프레디 쇼 씨, 여 씨, 주디 씨, 주디 씨의 남편 조지 드레이퍼 미주리 주 대법관. 여이순 씨 제공

여 씨의 노력도 헛되지 않았다. 주디 씨는 법대에 진학해 미국의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판사가 됐다. 지금은 미주리 주 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시카고 총영사관 산하의 대한민국 명예영사로 일하며 한국과 교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올해 60세인 주디 씨는 올해 5월 기자가 세인트루이스를 방문했을 때 “한시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한국이 광복 후 70년 동안 이룩한 성장과 발전이 자랑스럽고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류재풍 로욜라대 명예교수(74)는 ‘유학파’ 미주 한인이다.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 졸업 후 공부가 더 하고 싶어 196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공부를 마친 뒤 현지 대학에서 자리를 잡으며 미국 주류 사회에 뛰어들었다. 2012년 8월 현직 강단에서 물러난 뒤 ‘미국 내 한반도 통일 대박 전도사’라는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지난해 고교와 대학 동기인 신창민 중앙대 교수와 미국 전역을 돌며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을 교민과 미국인들에게 역설해 온 그는 ‘원 코리아 연합’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15일을 전후해선 워싱턴 일대에서 한반도 통일 기원 축제를 열 계획이다.

이처럼 220만 미주 한인은 미국 주류 정치권과 여론에 한국을 이해시키는 공공 외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7년에는 미국 하원의 역사적인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 냈고 지난해에는 버지니아 주 공립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쾌거를 거뒀다.

미주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계 미국인 로비 단체인 ‘공공정책위원회(AIPAC)’처럼 강한 조직을 지향하며 지난해에 첫발을 디딘 ‘미주 한인 풀뿌리 활동 콘퍼런스(KAGC)’는 한인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정치력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됐다. 지난달 24일 열린 두 번째 대회에는 미 연방 상하원의 지한파 의원 2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를 주도한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미주 한인들이 개인적인 성공에 머물지 않고 북한 인권, 일본의 과거사 왜곡 등 한국이 당면한 과제가 미국 시민사회의 주요 의제로 논의될 수 있도록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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