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시내의 옥류관.
주성하 기자
내가 다니던 당시 김일성대는 교직원만 1만5000명가량 됐는데, 대학 정문 주변에 식당은 룡흥식당 단 하나뿐이었다. 대학가 주변에 수백 개의 식당이 골목을 이루고 있는 서울의 신촌이나 홍익대 주변을 떠올린다면, 김일성대 앞에 식당이 하나밖에 없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평양의 대다수 사람들은 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오전 8시부터 90분 강의를 3과목 마친 학생 행렬이 대학 청사를 나서 우르르 정문으로 향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 속에서 걸음이 잽싼 무리가 있다면 룡흥식당으로 갈 확률이 높아 서로 눈치를 보면서 경계한다. 열심히 뛰어가도 점심시간엔 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요주의 무리를 발견하고 아닌 척 추격하다가 막판에 추월해 뒷줄에 세운다면 쾌감에 냉면 맛은 더 좋아진다.
어디 그뿐이랴. 대학 주변 아파트 가정집에서 하는 개인 식당도 많다. 말이 식당이지, 가정집에 들어가 밥상을 펴놓고 먹는 식이다. 각 집마다 메뉴가 특성화돼 있고 가격도 싸서 싼값으로 허기를 때우려는 대학 기숙사생들이 주요 단골이다. 이런 개인 식당들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 대학가 주변에 많이 생겨났는데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돈 떨어진 대학생들이 우산이나 장화와 같은 물건을 맡기고 외상으로 잔뜩 먹고는 방학에서 돌아와 한꺼번에 갚기도 한다. 서울도 먼 옛날에 대학생들이 그리 살았다고 하니 사람 사는 동네는 욕구나 인심이 거기서 거기라는 점을 새삼 느낀다.
요즘 평양에 식당들이 수없이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음식 문화 역시 서울을 따라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평양 사람들이 외식에 눈을 뜬 것이다. 얼마 전 평양 주민에게 어떤 식당이 유명하냐고 물었더니 수십 개를 줄줄 내리 읊는다. 그만큼 평양 사람들이 식당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고난의 행군 이전만 해도 식당은 한 개 구역에 고작 몇 개 정도만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평양에서 식당은 출장을 다니는 사람 또는 기숙사생이나 먹는 곳 정도로 여겨졌다. 식당 가격도 ‘량표’ 1장에 1∼2원이 대다수였다. 량표란 200g짜리 식량권을 의미하는데, 출장을 많이 다니는 사람은 쌀을 메고 다닐 수 없으니 배급 대신 외지 식당에서 밥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 수 있는 량표를 받은 것이다.
이때만 해도 유일한 손님 접대는 집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회사 동료들끼리 술 한잔하려고 해도, 부서 회식을 하려 해도 집밖에 장소가 없었다. 이렇게 동료들의 집을 찾아다니다 보면 같은 직장 사람들의 술버릇까지 아내와 자식들이 다 꿰뚫는다. 서로 길을 가다가도 “오, 너 아무개 동무 아들이구나” 하고 알아본다. 서로 상대방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살다 보니 동료들끼리 서로 끈끈해지는 면도 분명히 있다. 그 대신 가정주부들만 허리가 휜다.
나도 평양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 오면 이런 말을 들을 확률이 크다.
“어느 식당에 가서 술 한잔하자.”
여기서 또 하나 알아야 할 상식이 있다. 평양의 식당들은 어쩌면 서울보다 더 ‘레벨’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어느 식당에 가자는 말만 들어도 대충 내가 어느 정도의 접대를 받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평양의 식당 중 최고나 최하위 식당은 어디며, 어느 식당에 가면 ‘중앙당 5과’에서 선발된 미인이 접대를 할까. 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한번 다루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