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철 장애인알파인대표팀 코치
1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벨로드롬에 있는 대한장애인스키협회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한 양성철 감독. 이날 장애인 알파인스키 대표팀 선수들과의 첫 만남을 위해 깔끔한 양복을 입고 온 그는 “스키 지도자 느낌이 안난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 두꺼운 파카를 입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팀은 최근 폭설이 내린 남반구의 뉴질랜드로 17일 전지훈련을 떠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내가 좋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의 학창 시절만 해도 스키 선수들의 생명이 짧았다. 대학교 4학년이면 현역을 떠나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양 감독도 대학 졸업 후 선수를 그만뒀다. 스키를 계속 해도 받아줄 실업팀은 없었고 지도자를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마침 형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그는 1994년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
“많은 교포들이 그렇듯 세탁소, 채소가게 뭐 이런 일들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던 도중 우연히 휘슬러(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스키 경기장이 있던 곳)를 찾았다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어요.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다시 스키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선수로 새 출발을 하기에는 늦은 나이. 양 감독은 1996년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나다 휘슬러-블랙콤 스키레이싱클럽(현재는 휘슬러 레이싱클럽으로 합병)에서 본격적으로 지도자 공부를 시작했다. 1999년 캐나다스키인스트럭터협회(CSIA) 레벨4 자격증을 땄다. 아시아인으로서는 두 번째였다.
“레벨4 합격자는 1년에 많아야 3, 4명입니다. 시험 기간만 열흘이 넘는데 스키 기술은 물론이고 티칭, 필기, 에세이, 인터뷰 등을 모두 통과해야 하거든요. 무엇보다 티칭이 까다롭죠.”
“스키 강국인 캐나다에서 선진 훈련 시스템을 익히면서 정말 많이 배웠죠. 선수는 선천적인 재능도 타고나야 하지만 지도자는 후천적인 학습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선수는 못 됐지만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프로야구에서 인정받은 타격코치 가운데는 선수 시절 타율이 0.230 전후로 평범했던 이들이 많다. 스스로가 좌절했던 경험이 있어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스키 데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날렸던 양성철 감독이 지도할 대상은 시각(장애)스키와 좌식스키다. 대표팀 양재림(위쪽)이 지난해 소치 패럴림픽 여자 시각스키에서 가이드와 함께 슬로프를 질주하고 있다(위쪽 사진). ‘장애인스키의 대부’ 김남제 씨가 좌식스키를 타고 있다. 김 씨는 최근 좌식스키 유망주 및 상비군을 담당하는 전임 지도자로 선임됐다. 동아일보DB
지난해 소치 패럴림픽에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고도 메달을 따지 못했던 대한장애인체육회(회장 김성일)는 안방에서 열리는 평창 대회를 위해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했다. 대한장애인스키협회(회장 김우성)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알파인스키 같은 개인종목은 국가대표를 중심으로 한 ‘메달 그룹’과 신인 선수 발굴을 위한 ‘비메달 그룹’으로 나눠 평창 대회가 끝난 뒤에도 선수들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장애인체육회는 올 4월에 ‘평창 패럴림픽팀’을 신설해 종목별 추진 전략 및 지원 계획 수립을 마쳤고 7∼8월에 알파인스키, 노르딕스키, 아이스슬레지하키, 휠체어컬링 등 세부 종목의 지도자 및 전문 인력을 공개 선발하고 있다. 양 감독도 1차, 2차에 걸친 선발 공모를 통해 알파인스키 코치를 맡게 됐다. 장애인체육회는 “대표팀 감독으로는 패럴림픽 경험이 많은 외국인 지도자를 영입해 양성철 코치와 호흡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올림픽 효자 종목인 빙상과 비교하면 설상 종목의 훈련 방식은 덜 과학적이다. “제쳐” “더 밟아”만 목청껏 외친 뒤 “심장이 터지게 운동을 시켰다”고 자랑하는 지도자도 있다. 양 감독은 데이터와 과학을 강조한다. 그의 노트북은 세계적인 선수들의 경기 사진과 자료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 보니 그는 2013년 고려대 교육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논문 제목은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선수의 경기력 향상 방안 연구’였다.
“좋은 지도자만으로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는 없습니다. 피지컬 트레이너와 멘털 트레이너, 그리고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이 결합됐을 때 제대로 된 전략이 나올 수 있어요. 주위의 지원과 관심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갖고 있는 모든 것… 영혼까지 바치겠다”
1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벨로드롬 1층에 있는 대한장애인스키협회 사무실. 양 감독과 선수들이 처음으로 만났다. 8월 현재 대표팀은 좌식스키의 한상민, 이치원(35·하이원)과 시각스키의 양재림(26), 시각스키 가이드 고운소리(20·이상 국민체육진흥공단)로 구성돼 있다. 소치 패럴림픽 시각스키에서 아쉽게 4위를 했던 양재림과 한상민은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모두 양 감독의 지도를 받는다. 알파인스키 대표팀은 17일 남반구의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9월 중순까지 체류하면서 현지에서 열리는 대회에도 출전한다.
선수들을 잘 알고 있는 이준희 장애인스키협회 이사가 양 감독을 소개했다.
“주니어 대표를 했고, 최고 레벨의 지도자 자격증을 모두 딴 분이다. 캐나다에서 오래 생활해 국제 감각도 갖췄다. 하지만 장애인스키는 경험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100% 여러분을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극적인 소통이 중요하다.”
선수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씩 둘러본 양 감독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드넓은 설원에서 선수들을 가르쳤을까 싶을 정도로,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다.
“반갑습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슬로프에서 한두 번쯤은 여러분을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여러분과 대화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코치로 만나게 됐지만 때론 형처럼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실수를 하면 바로 얘기해 주세요.”
비장애인이 장애인 선수들을 지도하기는 쉽지 않다. 장애인체육회는 과거에도 비장애인 선수 및 지도자로 성공했던 인물들을 영입했지만 마지막까지 좋았던 경우는 많지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선수들을 무시한다’ ‘호구지책으로 대표팀을 맡았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든 발을 뺀다’는 등의 말이 나왔다. 장애인스키는 올 초 자격 미달의 비장애인 지도자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다. 선수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양 감독이 장애인스키 지도자 공모에 신청했을 때 이런저런 말이 나왔던 이유다.
양 감독 정도의 유명한 강사라면 스키 강습 몇 번만 해도 먹고살 만큼은 번다. 장애인스포츠 지도자가 프로종목 감독들처럼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왜 장애인스키와 인연을 맺었는지 물었다.
“재능기부와 봉사라고 하면 좀 건방진가요? 어릴 때 스키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의미 있는 일에 쓰고 싶었어요. 선수들이 잘 따라 준다면 2018년 평창 패럴림픽에서 꼭 메달을 딸 수 있을 겁니다. 좌식스키를 안 타봐서 문제없겠느냐고요? 모든 운동은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입식스키나 좌식스키나 운동·기술역학은 똑같거든요.”
선수들과의 마찰 등 문제가 생기면 장애인스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끝까지 간다 못 간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영혼까지 바치겠다는 각오로 뛸 테니 지켜봐 주세요.”
2018년 평창에서 한국 장애인스키는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결과는 가봐야 알겠지만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