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담화, 예상대로 미흡했으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예상외로 차분하게 대응 담화 다음 날 어려운 시점에서 손쉽게 여론에 편승하기보다 힘들지만 국익을 고려한 듯 대통령의 변화가 성과 내려면 일본의 위안부 해결 의지, 대통령의 소신 견지, 꾸준한 여론 지지 등 ‘3지’ 필요
심규선 대기자
아베 총리의 역사관이나 그간의 언행으로 미뤄 볼 때 아베 담화의 한계는 일찌감치 예상됐던 일이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와 언론은 아베 담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접고, 아베 총리의 입에 일희일비하거나 종속변수를 자처할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국익을 위해서는 과거사와 그 밖의 문제는 분리하는 투 트랙 전략을 써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베 담화를 주목했다. 기대에서 너무 빗나가면 어쩌나 해서다. 아베 담화는 참 길다. 무라야마(1995년), 고이즈미(2005년), 간 담화(2010년)의 배가 훌쩍 넘는다. 아베 총리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듯하다. 그러나 늘어난 양을 과거 일본의 입장을 합리화하고, 전후 일본의 국제적 공헌 등을 강조하는 데 할애했다. 다분히 일본 국내용으로 진정성이 희석됐다. 식민지배와 침략, 반성과 사죄라는 4개의 키워드가 모두 들어가긴 했으나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는 간접화법으로 책임의 소재도 흐렸다. 이왕 하는 반성과 사죄를 이렇게 숨은그림찾기 식으로 해야 하는지, 일본의 그릇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 부인을 들인 느낌이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쿨하게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 계승과 위안부 언급에 주목한다면서, 성의 있는 행동으로 신뢰를 보이라고 촉구했다. 비판받는 담화를 앞에 놓고, 그것도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선뜻 뽑기 어려운 카드였다. 아베 담화의 한계를 비판이 아니라 절제로 보완했다고 평가한다.
박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서 역대 대통령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취임 직후에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임기 말로 갈수록 갈등을 빚었다. 한일 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탔다거나,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매번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박 대통령은 이런 패턴을 경계했다. 취임 직후의 삼일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놀랄 만큼 강경한 표현을 썼다. 그 후에도 일관되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국내외 회견에서 일본 비판을 빼놓은 적이 없다.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가장 기대를 걸었다가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이 됐다. 국내에서도 너무 경직됐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노선 변경은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더이상 일본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일본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판단, 중일의 화해 무드에 따른 외교 고립 우려, 미국의 걱정과 중재 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소신을 꺾기 싫어하는 대통령이, 그것도 한일 외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론보다 국익을 선택한 드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