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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소녀 악몽속 ‘그놈’… 콕 찍어 잡은 그림 한 장

입력 | 2015-08-18 03:00:00

[증거는 말한다]<7>몽타주, 여전히 중요한 해결사




경찰청 증거분석계 이상숙 행정관이 13일 몽타주 제작 프로그램을 이용해 용의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리는지 시연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여름이었다. 새벽녘이었지만 밖도, 안도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할머니와 둘밖에 살지 않는 집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추리닝과 속옷을 누군가 잡더니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소리를 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둠과 사람 얼굴이 제대로 구별되지 않았지만, 위급한 상황일수록 인간의 뇌는 더욱 영민해진다. A 양(당시 12세)은 범인 얼굴을 순간적으로 두 눈에 깊숙이 담았다. 할머니가 쫓아오는 소리에 범인은 집 밖으로 도주했다.

2013년 벌어진 이 사건 용의자의 몽타주를 작성하기 위해 경찰청 이상숙 증거분석계 행정관은 서울에서 제주도로 날아갔다. 지역별로 몽타주 담당자가 1, 2명 있는데 당시 제주도에는 몽타주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행정관은 우선 아이를 다독거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1999년 개발된 한국형 몽타주 데이터베이스를 열고 얼굴형을 아이와 함께 골랐다. 둥근형, 타원형, 각진형, 갸름한 역삼각형, 긴형 중 하나를 골라 클릭하니, 15여 개의 세부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예를 들면, 달걀형 얼굴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다. 눈 코 입 하나하나 닮은 것보다는 전체적인 인상이 맞아야 범인을 잡을 수 있다.

과거에 몽타주로 작성했었던 범죄 용의자들의 얼굴이 계속 축적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인상이 누구와 비슷한지’ 피해자나 목격자가 참조할 수 있다. 똑같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이 사람과 비슷한데 눈이 좀 더 처졌던 것 같다”고 말하면, 컴퓨터 작업을 통해 부위를 수정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컴퓨터 속 ‘펜’과 ‘브러시’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 때문에 몽타주 요원을 뽑을 땐 예술 감각이 높은 사람들을 선호한다. 이 행정관 역시 의상학을 전공했다.

A 양의 증언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완성했다. 이 행정관은 컬러와 흑백으로 각각 출력해 어떤 사진이 당시의 느낌과 더 가까운지 물었다. 범죄는 어둠 속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 중 70%는 흑백사진을 고른다. 경찰들은 이를 바탕으로 용의자를 찾으러 다녔다. 결국 용의자(당시 39세)를 검거할 수 있었다.

몽타주는 프랑스어로 ‘조립하다’라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연평균 300건을 넘던 전국 몽타주 의뢰 건수는 지금은 100여 건으로 줄어들었다. 목격자를 찾는 것보다는 폐쇄회로(CC)TV 화면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각지대나 변두리 지역 등에선 몽타주가 여전히 범죄 해결의 중요한 단서다.

국내에서 몽타주 업무가 시작된 것은 1975년 경찰이 화가를 특채로 뽑던 때부터다. 1995년 미국 프로그램을 잠깐 수입해 쓴 적도 있었지만, 한국인 외모와 차이가 났다. 1999년 도입된 한국인 프로그램은 눈 코 입 광대뼈 형태를 포함해 총 1만1000여 개의 부위별 데이터베이스가 현재 구축되어 있다. 머리카락 형태만 하더라도 1185개에 이른다. 모자나 안경 소품도 고를 수 있다.

‘범죄자 얼굴’이란 게 따로 있을까. 보통은 우락부락하거나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몽타주 작성요원들은 “목격자들이 자주 묘사하는 수식어가 ‘착하게 생겼다’ ‘순하게 생겼다’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특히 연쇄살인마 유영철이 2004년 저질렀던 인천 월미도 살인사건의 목격자는 몽타주를 그릴 때 “곱상한 얼굴”이라고 했다. 이 행정관은 “한국인의 얼굴형이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다 보니 요즘 몽타주를 보면 각진 얼굴은 사라지고 꽃미남형이 많다”고 말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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