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화신으로 나오는 뽕쟁이 재벌 3세 영화에 카타르시스 느끼는 젊은이들 영화의 단순논리에 빠져들면 600만 비정규직과 취업절벽 진정한 원인 놓치기 쉽다
황호택 논설주간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에서 조현아 부사장이 바로 사과했더라면 끝날 일을 자꾸 덮으려다가 여론의 공분을 일으킨 것도 이 영화가 차용했다. 조태오는 ‘미안합니다’라고 했으면 잘 마무리됐을 폭행사주 사건을 덮으려다가 종국에는 경찰관 살인교사 사건으로 키워 파멸로 치닫는다. 조태오가 이복형제들과 통신회사의 경영권을 놓고 경쟁하는 과정은 롯데 ‘형제의 난’과 닮았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화물차 운전사의 다리 깁스에 ‘아빠 힘내’라고 쓰인 글씨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깁스에 ‘엄마 사랑해, 쪽∼’이라고 쓰여 있던 것을 모방한 듯하다.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종북 좌파’라는 딱지를 한껏 조롱한다. 부당해고를 당한 화물차 운전사는 하청업체 사장에게 따지고 들다가 “왜 그런 단체(민주노총)에 가입해, 니들이 종북 좌파야”라는 힐난을 듣는다. 조태오 사건에 매달리는 서도철(황정민)은 반장한테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니가 좌빨이야?”라는 핀잔을 받는다. 종북 좌파나 좌빨이라는 욕을 먹는 사람은 부당하게 탄압받거나 어려운 여건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인가.
‘베테랑’의 관객은 대부분 10대, 20대로 관객 600만 명을 돌파해 1000만 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은 직장이 대기업인데, 대기업을 조롱하는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젊은이들의 이중심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젊은이들이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영화에서는 신진그룹이 광고를 풀어 조태오 관련 기사를 완전히 틀어막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지금 다매체 다채널의 세상에서는 이 정도의 ‘특종기사’를 완전 봉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벌이고 정치인이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은 과거보다 촘촘한 그물망 감시를 받으며 살아간다. 땅콩 회항 사건을 종합편성채널이 미주알고주알 까발리면서 확대재생산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조현아 씨는 집중 조명을 받음으로써 무거운 죗값을 받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최근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롯데 경영권 분규에서 보듯이 한국 재벌도 반성할 대목이 많다. 전경련 관계자는 “선진국은 산업자본의 역사가 200년, 300년이지만 한국은 60년 정도에 압축성장을 했다. 일부의 잘못이 전체인 양 비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와 노동개혁 등 한국 경제를 위한 과제가 많지만 반재벌 정서가 걸림돌이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재벌을 악으로, 민노총을 선으로 단순화하는 공식으론 복잡한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한국 경제가 어려운 여건에서 이만큼이나 버티는 것은 대기업의 수출 경쟁력 덕분이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상위 10%의 고임금에 60세 정년까지 보장받는 민노총의 철밥통 기득권이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온상이다. 영화적 재미에 빠져들어 ‘베테랑’의 단순 논리에 설득당하면 600만 비정규직의 눈물과 취업절벽을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놓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