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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천광암]반환점의 경제학

입력 | 2015-08-20 03:00:00


천광암 산업부장

“여러분, ‘경포대’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고….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 (실제로는) 경제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다.”

“지지율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에 해당하는 2005년 8월 25일 KBS의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자신은 경제를 잘 챙겼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언론의 비우호적 보도로 인해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불만을 특유의 반어법과 독설로 표현한 것들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는 데보다는, 경제가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집권 후반부를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경제정책 책임자로서 박 대통령이 받는 평가는 최소한 ‘포기’라는 수식어가 붙는 정도는 아니다. 지지율도 노 전 대통령에 비해 10%포인트가량 높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처한 경제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당시만 해도 전자 화학 조선 등 우리 주력 산업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잠재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가시적인 형태로 눈앞에 닥쳐 있다. 또한 ‘고용 없는 성장’이 체질화하면서 청년실업은 비탈길에서 절벽으로 치닫는 중이다.

경제적 난제들을 잔뜩 안은 박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전례는 노무현 정부 외에도 두 가지 정도가 더 있는 것 같다. 먼저 또 다른 반면교사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례다.

기업 친화적인 MB노믹스를 앞세워 당선된 이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 규제 완화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력과 소통능력 부족으로 ‘부자감세’ ‘영리병원’ ‘귀족학교’ 등 좌파진영의 낙인찍기 전술에 발목이 잡혀 반환점도 돌기 전에 자신의 정책 컬러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러면서 들고나온 것이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 등의 구호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진정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데 있다. “기름값이 묘하다”는 발언에 이은 알뜰주유소 도입, ‘배춧값 국장’으로 통하는 물가관리책임실명제 시행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포퓰리즘의 단맛에 빠져 집권 후반기를 허송한 결과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박근혜 정부로 고스란히 상속됐다.

박 대통령에게 벤치마킹이 될 만한 것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사례다.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전 총리는 노사정 대타협이 무산되자 집권 중반경인 2002년 경직적인 노동시장을 개혁하기 위한 ‘어젠다2010’을 자체적으로 마련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과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인기 없는 개혁안을 강행한 결과 그는 2005년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 당시에는 그의 개혁안이 싸구려 일자리를 양산한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슈뢰더 전 총리를, ‘유럽의 병자(病者)’라고 불리던 독일의 경제를 되살려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이라고 칭송한다.

슈뢰더 전 총리는 5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개혁을 추진하고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정치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의지다.”

노동 공공 교육 금융 등 4대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박 대통령이 남은 2년 반 동안 두고두고 되새겨 봐야 할 말이다.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