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9월호/탈북 청년박사가 본 ‘통일대박’ 민낯 제3국을 선택하는 탈북자가 늘었다. 탈남입북(脫南入北)자도 등장했다. 북한이 ‘조국’이라며 되돌아가게 해달라는 이들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중앙합동신문센터 수사관이 던진 첫 질문은 싸늘했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후 귀순 사실을 알리고자 허공에 총 서너 발을 쏜 탓에 방한복에 스민 매캐한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수사관의 거친 물음은 미몽을 헤매던 나를 깨웠다.
하나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얼떨결에 되받아친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 태도면 이곳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어.”
수사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나는 대북 전단과 심리전 방송을 통해 밝힌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환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휴전선이라는 사선을 넘어왔으되 또 다른 사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직관했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었다. 중앙합동신문센터와 탈북자 정착기관 하나원을 거쳐 한국 생활을 시작한 뒤, 태어나 처음 접해본 인터넷을 통해 무시무시하다는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실상을 알았다. 구타와 고문을 당한 탈북자들이 법정 소송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것이다. 지하조사실에서 고문한 뒤 중앙합동신문센터 내 예배당에 데리고 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죄를 회개하라는 강요된 의식까지 치르게 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중앙합동신문센터는 지난해 ‘탈북자 간첩’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유우성 사건의 출발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유우성의 동생 유가려는 법원에서 “달력 없는 독방에서 변호인 접견도 차단된 채 회유와 협박, 폭행을 당해 오빠가 간첩이라고 허위자백을 했다”고 폭로했고 사법부는 ‘유우성의 여동생에 대한 변호인 접견 및 서신 전달 신청을 불허한 국가정보원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국정원은 이후 중앙합동신문센터의 명칭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바꿨으며 언론에 관련 시설을 공개했다. 인권침해 오해를 없애겠다면서 조사실을 개방형으로 바꾸기로 했으며, 법률전문가를 ‘인권보호관’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유우성은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둘 이룰 수 없는 꿈
나는 비무장지대에 주둔한 북한군에서 심리전을 담당했다. 휴전선 남쪽에서 넘어오는 대북 방송을 제압하고, 전단을 수거해 소각하는 업무도 맡았다. 그때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을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있는데 ‘세계일주’를 꿈꾸며 휴전선을 넘어간 북한 군인이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 자신의 꿈을 이뤘다는 문구와 웃는 얼굴이 박힌 전단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한국에 온 후 멋도 모르고 여권을 신청했다. 굳이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발급된 여권을 통해 자유로운 몸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권 발급이 허가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자가 일반 국민과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이다. 당시에는 외교부와 경찰뿐 아니라 국정원의 허락을 받아야 여권을 발급받았는데 그것도 복수여권이 아닌 단수여권만 허용됐다. 여러 탈북자와 단체들이 여권 발급 제한이 ‘차별행위’라며 항의 시위에 나서고 소송을 제기한 덕분에 여권 발급 기준은 완화됐다.
모든 탈북자는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는데, 주민등록상 한국의 첫 거주지가 하나원이 위치한 경기 안성시가 돼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25, 여자는 225로 시작됐다. 중국 정부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보고 탈북자를 식별해 비자 발급 등을 거부하곤 했으며, 중국 공안이 탈북자를 붙잡아 북한에 넘긴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탈북자들과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세 자리가 같은 안성시민들도 한동안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2009년에 와서야 ‘북한 이탈주민 보호·정착지원법’ 개정안이 통과돼 하나원의 소재지를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은 이는 한 차례에 한해 정정할 수 있게 됐고 이후 입국한 탈북자들도 북한이나 중국이 탈북 사실을 추정할 수 없게끔 125, 225로 뒷자리가 시작하지 않는 번호를 부여받게 됐다.
그후 많이도 돌아다녔다. 여행, 세미나, 초청방문, 어학연수 등으로 여권에 방문 도장이 빼곡히 찍혔다. 전자여권이 새로 나왔다고 해 재발급을 신청했는데, 단 3일 만에 새 여권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 휴전선을 넘어온 선배 귀순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남쪽 땅을 밟았지만 삶은 힘겨웠고 세계일주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는 오래전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한 언론매체가 ‘진정한 자유를 찾아 외딴 산골로 들어갔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만사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다.
셋 “우리는 3등시민?”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탈북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한 번은 사기를 당하는 게 교과서”라고 말했다. 필자의 경험이나 주변 탈북자를 봤을 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사기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적응한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내가 갖게 된 얼마 안 되는 정착금을 사기 친 사람은 한국인이고, 생계비이던 기초생활수급비를 가로채간 사람은 같은 탈북자다.
북한에서 굶어본 적 없던 나는 정작 한국에 와서 굶는 고통을 경험했고, 살아남고자 조선족 동포보다 더 어수룩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식당에 어렵게 취직했다. 일식집에서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8시간 일할 때 12시간 일했다. 월급은 그들보다 50만 원 적었다. 나는 그때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5년 현재 탈북자가 2만8000명을 넘어섰다. 내가 탈북한 10년 전에 비해 사정이 나아졌을까.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탈북자 조사 자료에 따르면 탈북자의 범죄 피해율은 24.3%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범죄 피해율 4.3%의 5배가 넘고 사기 피해율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43배에 달해 탈북자 5명 중 1명꼴로 사기를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통일부와 남북하나재단이 조사해 발표한 자료는 “탈북자들이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해 더 많은데도 월 평균소득은 76만 원 정도 더 적다”고 밝힌다. 탈북자 실업률이 전체 국민 실업률보다 4배 넘게 높고 자살률도 3배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탈북자 5명 중 1명은 한국에 와서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실업은 빈곤과 배고픔을 의미하고 자살은 삶과의 단절을 뜻한다. 상황이 더 악화한 것이다.
나는 국회와 여러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학부 졸업장을 들고 기업에 취직하려 할 때 번번이 좌절했다.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으로 하향해 지원했건만 서류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자기소개서 등에서 탈북자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지원했더니 그제야 줄줄이 합격통지가 날아왔다.
민주주의의 성취를 자랑하고 통일의 주체가 되겠다고 나선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는 아직까지도 주홍글씨와 같은 꼬리표를 달고 산다. 조선족 동포를 흔히 ‘이등시민’으로 취급한다. 그들에 대한 차별과 냉랭한 시선이 존재하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탈북자는 어떤가. 일부 탈북자가 조선족 동포로 행세하는 것을 종종 봐왔다. 조선족 동포면 취업이 되지만 탈북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을 받았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면서 ‘삼등시민’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탈북자는 군대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일부 탈북자는 조국이 자신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여긴다고 수군댄다.
넷 정치적 귀순 → 목적형 탈북
탈냉전 이후 본격화한 탈북 주민의 한국 입국은 성격과 유형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이어진다. 체제 경쟁 시기에는 ‘정치적 귀순’이 많았다. 휴전선을 통해 군인이 넘어오거나 해외 북한공관의 주재원이 탈북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경제난은 ‘생존형 탈북’을 낳았고 이는 먼저 입국한 탈북자가 가족, 친지, 친구를 데려오는 ‘연계형 탈북’으로 진화했다. 최근에는 엘리트와 비교적 젊은 세대 중심의 ‘목적형 탈북’으로 확대됐다.
남과 북이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의 귀순자는 북한 체제와 비교해 한국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해주는 존재로서 정치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지금은 탈북자가 타자화와 무가치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적 이용 가치는 고위층 출신이거나 기득권 탈북자에게만 한정된다.
탈북자 대부분은 자본주의 경쟁사회에 발을 디디는 순간 ‘호구지책’과 ‘개인의 책임’ ‘무한경쟁’이라는 사선에 선다. 이질적 제도에서 살아온 탈북자에게 생소한 자본주의에 적응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고, 사회는 더 많은 도전과 노력을 요구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탈북자도 있지만 전체에 비하면 소수다. 열패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다섯 과녁을 못 맞히는 궁수
탈북자를 통일의 마중물, 통일의 시금석, 통일의 가교, 통일의 디딤돌, 통일한국의 리트머스 시험지, 통일인재, 통일자산, 통일미래, 통일주역, 통일일꾼이라고 명명하는 일부의 호들갑을 보면 한국 사회가 탈북자의 중요성은 분명히 인지하는 듯하다. 하지만 과녁을 못 맞히는 궁수처럼 딱 거기까지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의 본모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낙인 효과, 삼등국민, 아웃사이더, 차별, 배제, 부적응, 갈등의 씨앗, 주변인, 소수자, 거류민, 비국민, 탈남입북과 같은 용어에 내부적 타자들의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태도의 현주소이면서 반영이다.
여섯 ‘탈북민’으로 칭하라!
인식의 이중성과 태도의 다중성만큼이나 탈북자를 가리키는 명칭도 다양하다. 귀순자, 귀순용사로 불린 시기가 있는가 하면, 귀순동포를 거쳐 최근에는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새터민으로 호칭된다. 사회에서는 망명자, 탈북난민, 탈북동포, 이주민, 정착민, 북향민 등 수십 가지의 호칭이 난무하는데, 상황에 따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지금껏 제대로 정립된 용어조차 마련되지 못한 것은 정책의 비효율성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명명한 것은 정작 탈북자 본인들이 터부시한다. 1997년부터 법률적 용어로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했고 2005년부터는 새터민으로 부르기로 했지만 탈북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넘어 냉담하기까지 했다. 이물감을 느낀 21개 탈북자 단체가 모여 ‘새터민 명칭 사용 거부’를 결의한 후 주무 부처인 통일부에 항의했다. 다른 NGO도 가세해 정부를 압박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스스로 ‘탈북민’이란 용어를 정립해 탈북자 사회에서 환기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 일부에서도 탈북민이라는 용어를 엉거주춤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일곱 “나 돌아갈래”… 脫南入北
목숨을 걸고 찾아온 한국 사회를 등지고 떠나는 탈북자가 늘고 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일각에서는 탈남(脫南)했거나 떠났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한국 사회가 통일의 모델로 벤치마킹하려는 독일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탈출자는 350만 명에 달한다. 이중 3국행을 택한 이는 극소수인데, 우리는 3만 명도 안 되는 탈북자중 상당수가 제3국행을 선택한다. 심지어 북한으로 돌아간 탈남입북(脫南入北)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가 북한이 ‘조국’이라면서 돌려보내달라고 공공연하게 송환을 요구하는 일도 있다.
북한으로 되돌아간 사람들은 20~60대의 다양한 연령대에 걸쳐 있다. 가족을 모두 데리고 ‘재입북’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북한으로 간 ‘재입북’자 중 여러 명이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것을 꼼꼼하게 관찰하면서 나는 몇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북한 체제에 유리하게끔 설계된 강요된 기자회견이겠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격앙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은 냉정하고 차별이 심한 데다 실업과 이분법, 배타성이 만연한 사회, 다시 말해 ‘인간 생지옥’이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같은 말을 하며 그들의 감정이 격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연출은 아니라고 느꼈다. 탈북자인 나도 그들의 모습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평양에서 침을 튀기며 ‘남조선’을 욕하던 탈북자 중 일부가 또다시 재탈북해 서울로 온 것이다.
여덟 묵직한 괴로움
요즘 다시 바람이 분다. ‘탈남’하는 탈북자들이 한때는 동유럽으로, 한때는 서구권으로 가더니 최근에는 다시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들로 발길을 돌린다. 개중에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국제 미아로 떠도는 이도 적지 않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가정을 이룬 절친한 친구는 요즘 별말 없이 짐을 싸고 있다. 최근에는 K대를 졸업하고 반듯한 직장에서 근무하던 같은 고향 출신의 형이 두 딸을 데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행여 북한으로 간 게 아닐까 그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수군거리지만 나는 안다. 어디로 갔든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란 사실을.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적막함과 쓸쓸함은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묵직한 괴로움이다.
아홉 “북한 주민 마음 얻어야”
2014년 통일대박론에 이어 올해에도 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통일 논의가 계속된다. 올해는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이한 해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통일을 떠들지만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거나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통일을 얘기하면서도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가 불명확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일을 준비하는지도 당최 알 수 없다.
‘한국 사회가 건강해야 통일된 나라도 건강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그들은 탈북 후 한국에 정착한 고향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통일 후 자신이 받을 대우와 삶의 질을 가늠할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탈북자의 현실은 암담하다. 정부의 정착 지원과 사회의 포용력, 탈북자의 적응 태도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2만8000명의 탈북자도 품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2400만 북한 주민과의 통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통일의 마중물로, 통일대박의 시금석으로, 남북공동체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불리는 탈북자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겪는 일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통일은 책임지는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열 분단이 낳은 또 한 명의 ‘조난자’
메르스 확산으로 사회가 어수선할 때 휴전선을 통해 북한군이 귀순했다는 속보가 떴다. 뭔가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가 가기도 전에 북한군 귀순자에 대한 냄비 같은 뉴스가 언론 매체를 뒤덮더니 ‘호출귀순’ ‘노크귀순’ 때처럼 ‘대기귀순’ ‘숙박귀순’ ‘1박2일 귀순’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언론은 정부와 국방부를 압박했다. 먼저 휴전선을 넘어온 나로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귀순 이튿날 ‘함흥에서 200km 걸어서 귀순한 병사’라는 제목과 함께 친절하게도 귀순동기와 소속부대, 보직과 고향, 키와 몸무게, 경로와 귀순 시 제스처까지 낱낱이 공개됐다.
탈북자의 신변 및 정보 보호를 최우선해야 할 국방부와 언론이 책무를 버리고 또다시 힘없는 탈북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비윤리적 행태를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준 것이다. 자유를 찾아왔지만 평생 고통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할 어린 귀순자는 현재진행형인 한반도 분단이 낳은 또 한 명의 조난자이자 사생아다.
● 주승현 최연소 탈북인 박사다. 3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원 및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강사로 있다.
주승현 민주평통 자문위원·북한이탈주민·정치학 박사 joosy3050@naver.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