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의 발우공양을 표현한 이미지. 불교신문 제공
그런데 요즘 세상이 바뀌면서 공양주 보살을 구하기 어려워진 모양입니다. 몇몇 스님들에게 귀동냥을 하니, 규모가 있는 사찰의 공양주 보살은 한 달에 100만∼150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하네요. 기거하는 이가 서너 명밖에 안되는 암자는 보수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절집에서 만나는 ‘공양게(供養偈)’는 종교를 떠나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한 내용입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마음의 온갖 허물을 모두 버리고/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망각의 인간인지라 그 기억은 차츰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5년 전 제대로 밥값하고 있느냐는 ‘죽비’가 다시 어깨에 딱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밥값’입니다. ‘어머니/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아무리 멀어도/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한 구절 한 구절 꼭꼭 씹었습니다. 밥값 때문에 지옥까지 갔다 와야 하느냐는 불만도 있었지만 마음속에 공명의 동심원이 퍼졌습니다. 중년이라면 쉽게 다가오는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겠죠. 아, 그래 밥값도 제대로 못하고 또 허송세월했구나, 이런 자책도 따라왔습니다.
얼마 전 안부도 전할 겸 전화로 정 시인에게 “요즘 밥값은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나야 좋은 시 쓰는 게 밥값인데, 아직 먼 것 같아요. 하지만 밥값 다하고 사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하는 시늉은 해야죠”라고 하더군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엉큼한 안도의 미소가 번지더군요, 저만 밥값 못하고 사는 게 아니라는.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