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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사 명장면]6·25이후 대화 물꼬 튼 두 사건

입력 | 2015-08-24 03:00:00

[광복 70년]중공機 불시착에 울린 공습경보, 한중 수교 신호탄이었다




1983년 中 민항기 불시착 1983년 5월 5일 중국민항 소속 트라이던트 비행기가 강원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뒤 활주로를 벗어나 멈춰서 있다. 공중 납치된 이 비행기와 승객의 송환을 위해 한국과 중국은 첫 당국 간 협상을 시작했고 상호 만족스러운 합의에 이르게 된다. 동아일보DB

한중 수교는 ‘북방외교’의 하이라이트이자 결정판이었다. 1992년 8월 24일 당시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北京)에서 수교 서명을 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수교 협상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식으로 시작됐다. 공중과 해상에서 이뤄진 피랍, 반란 사건이 한중 당국을 이어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린이날 휴일을 즐기던 1983년 5월 5일 서울에 공습경보가 울렸다. 중국 선양(瀋陽)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가다 공중 납치된 ‘중공’ 민항기가 나타났기 때문. 승객 96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항 소속 B-296 트라이던트 여객기는 6명의 무장납치범에 의해 강원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 이 민항기 피랍 사건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당국 간 교섭을 시작했다.

○ 피랍 당일 중국이 “교섭하자”고 보낸 전문


흥미로운 대목은 중국이 사건 발생 직후 민항국장 명의로 한국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표기해 전문(電文)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교섭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달라”며 당국 간 교섭을 요청한 것이다. 사건 이틀 만인 5월 7일 교섭 대표단 33명을 태운 중국민항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날부터 협상을 서두른 양국은 3일 만인 5월 10일 새벽 기체와 승객을 인도하는 조건에 합의했다. 승객들은 10일 뒤, 기체는 14일 만에 베이징으로 인도됐다. 납치범들은 항공기운항안전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4∼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대만으로 강제 추방됐다.

왜 중국은 이렇게 협상을 서둘렀을까. 이 사건 7개월 전인 1982년 10월 16일 우룽건(吳榮根) 조종사가 전투기 ‘미그-19’를 몰고 망명했을 때나 1983년 8월 7일 쑨톈친(孫天勤) 조종사가 ‘미그-21’를 타고 귀순했을 때도 당국 간 협상은 없었다. 기체와 조종사의 송환을 요구했을 뿐 당국자를 보내지는 않았다. 박춘호 전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은 회고록에서 “당시 이 비행기에 중국의 거물 유도탄 학자가 타고 있었다”고 전했다. 민감한 정보가 한국 또는 대만으로 유출될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당시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본보에 “기내 화장실에서 찢어버린 신분증까지 모두 뒤졌지만 선양 항공학교 간부라는 것까지밖에 밝혀내지 못했다. 박 전 재판관의 회고가 일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아무튼 민항기 사건은 건국 이후 첫 한중 전문 교환, 정부 대표단 방한, 첫 공식 협상, 정식 국호를 사용한 문서 교환 등의 기록과 함께 한중 간 대화가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1985년 中 어뢰정 표류 1985년 3월 22일 공해상에서 표류 중 우리 어선에 구조된 중국 어뢰정(오른쪽)이 다음 날인 23일 한국 해군에 인계돼 예인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중국 해군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위기를 넘기고 관계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동아일보DB

○ 덩샤오핑 “한국과 가까워지면 우리도 좋은 일”

덩샤오핑(鄧小平)은 1985년 4월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 한중관계 발전이 중국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첸 전 외교부장의 회고록 ‘10가지 외교의 기록(外交 十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왜 덩샤오핑은 갑자기 이런 말을 했을까. 한 달 전 발행한 중국 어뢰정 선상 반란 사건에 단초가 있다.

적에서 협력관계로… 한국 온 중국軍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 선상 반란 사건 당시 숨진 동료들의 입관 절차를 확인하기 위해 승조원 대표 2명이 전북 군산의료원으로 향하고 있다. 6·25전쟁 이후 중공군의 한국 망명은 종종 이어지던 일이었다. 동아일보DB

1985년 3월 22일 중국 어뢰정은 서해 대흑산도 근해에서 한국 어선(제6어성호)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전날 해상훈련 도중 발생한 선상 반란 사건으로 승조원 6명이 사망한 뒤 연료가 떨어져 표류하던 상태였다. 해군 및 해경과 어선이 어뢰정을 전북 군산항으로 예인하던 23일 중국 군함이 어뢰를 찾기 위해 한국 영해를 침범했다. 한국은 해공군 합동으로 퇴거 작전을 벌이는 한편 중국에 엄중 항의하는 각서를 전달했다. 3일간 협상 끝에 중국은 ‘중공 외교부의 위임’을 명시해 홍콩 주재 신화사 명의로 △유감 표명 △관련자 문책 △잘못 시인(apology) 등 3가지 내용을 담은 서한에 서명했다. 건국 이래 한국이 중국에 사과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해외에서 한중 정부가 협상을 벌인 것도 처음이었다.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 서리 주재로 열린 대책회의에서 망명을 요청하는 중국인은 대만으로 보내던 관례를 깨고 승조원과 어뢰정을 모두 중국에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기국(旗國)에 권리가 있다’는 국제해양법을 적용한 결과였다. 덩샤오핑이 한국과의 관계에 우호적 발언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계기로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과 신화사 사이에 정기적인 대화 창구가 개설돼 수교의 발판을 마련했다. 덩샤오핑은 중국계 미국인인 애너 셰널트 비밀특사를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내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이 기사는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과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의 인터뷰, 박춘호 전 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의 회고록 등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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