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개봉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DVD에 든 증정용 그림엽서. 체 게바라가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포데로사’라는 이름의 모터사이클로 남미를 여행 중인 장면이다.
그 여행은 ‘로어 포티에이트(Lower48·하와이를 뺀 미국 본토의 알래스카 주 이남 48개 주)’를 ‘ㅁ’자로 도는 ‘포코너(4corner)’ 일주였다. 17년 전 내가 한 ‘ㄷ’자의 ‘스리코너(3corner)’가 1만7000km였으니 여행거리가 2만 km는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짤막한 e메일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어울리며 깨치고 얻은 귀중한 배움과 따뜻한 인정이 들어있어서다.
그는 여행길에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대부분 시골에 사는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또 좋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크리스는 모터사이클 여행 중에도 늘 일기를 써왔던 모양이다. 일기는 랩톱에 글과 사진, 동영상의 형태로 담았는데, 핵심은 물론 그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격의도 사라지게 마련. 그들은 크리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안했고 크리스도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호의 다음엔 늘 ‘문제’가 있었다. 시골 사람들이 숙식에 대한 대가를 원치 않는다는 것. 그걸 잘 아는 크리스는 나름대로 대안을 갖고 있었다.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주는 것이다. 그걸 감사카드와 함께 그들 모르게 집 안에 두고 떠난다. 이후는 예상하는 대로다. 그들로부터 감사전화와 편지가 오고 그걸 통해 인연은 더 깊어지고….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크리스. 이번에도 그들이 보낸 편지와 e메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크리스는 내게 보낸 e메일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여행에 든 비용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 내내 하느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받는 것보다는 베푸는 게 더 나은 삶이라고.’ 그런데 이 말, 서른세 살 독일 청년 미하엘 비게(방송작가)가 얻은 교훈과 똑같다.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려고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남극까지 1만5000km의 여행을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마련한 돈으로 끝내 성공했다.
그는 여행기 ‘땡전 한 푼 없이 떠난 세계여행’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 여행을 통해 인생엔 ‘더 많이’가 필요 없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노라고.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며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오는 동안에 상실한 매의 시력(3km 상공에서도 낚아챌 병아리를 볼 수 있는)을 되찾았다고. 여행 전만 해도 30cm 앞의 모이만 쪼는 닭에 불과했는데….
크리스의 여행일기가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아르헨티나)의 여행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온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의 인생에 모터사이클 여행이 귀중한 자산이 됐음은. 의사 임용 직전 친구와 함께 모터사이클을 타고 페루 볼리비아 등 남미 대륙을 무전여행한 체 게바라. 그 여행기록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서문엔 여행이 그를 민중혁명가로 이끌었음을 암시하는 문구가 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더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