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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최초의 사찰 아스카, 백제 장인들이 세운 첨단건축물

입력 | 2015-08-26 03:00:00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2>아스카 절(飛鳥寺)




①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사에 모셔진 아스카 대불. 606년 석가탄신일인 사월초파일에 맞춰 완성됐으나 1196년 벼락을 맞아 산산조각 난 채로 629년간 비바람을 맞으며 방치됐다가 1825년 원래 불상의 얼굴 윗부분과 오른손만 남겨두고 나머지 80% 부분은 청동과 점토로 복원해 새로 지은 현재의 금당 안에 안치했다. ② 아스카사 앞에 선 우에지마 호쇼 주지 스님은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저희 금당 앞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이 충남 부여랑 많이 비슷하다고 하던데 정말 비슷한가요?”라며 웃었다. ③ 시미즈 아키히로 데즈카야마대 교수가 꽃잎의 끝을 삼각형 아니면 원형으로 도톰하게 처리한 백제 양식의 아스카 시대 연꽃무늬 기와를 설명하고 있다. 아스카·나라=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일본 불교의 1번지.’

나라(奈良) 현 다카이치(高市都) 군 아스카(明日香) 촌에 있는 사찰인 아스카(飛鳥)사 앞 공터에 걸려 있는 현수막 문구이다. 광활한 들판에 금당(본존불을 모신 법당, 절의 본당) 하나만 달랑 남아 있는 이 초라해 보이는 절이 596년 창건된 일본 최초의 절이라니.

별 기대 없이 금당 안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본존불 크기가 너무 커서 기자의 시선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아스카 대불(大佛)로 불리는 청동 좌불의 앉은키는 무려 2.75m. 불경에 기록된 석가모니 부처의 키 1장 6척(약 4.8m)에 맞춰 제작된 것이다.

사각 턱의 길쭉한 얼굴과 손이 강조되어 있다 보니 실제 키보다도 더 커 보이는 불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당 안에 불상을 모신 게 아니라 불상을 위해 금당을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대불이 완성된 날은 606년 음력 4월 8일로 석가탄신일과 같다. 청동이 무려 약 15t(2만3000근)이 들어갔고 금박을 입히기 위해 들어간 황금만도 30kg(750냥)에 달한다고 한다.

대불을 만든 사람도 백제계 후손 도리(止利) 불사(佛師·불상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훗날 일본 미술사가들이 ‘도리 양식’이란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불교 미술의 새 장을 연 개척자로 평가받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통해 자세히 전할 예정이다.

○ 일본 불교건축의 첫 장을 연 백제인들

기자가 불상 크기에 놀라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우에지마 호쇼(植鳥寶照·40) 주지 스님은 불상 왼편에 붙어 있는 아스카사 원형을 복원한 지도를 가리키며 “원래 아스카사는 현재 크기의 20배나 됐다. 남쪽 맞은편에 20m 도로를 사이에 두고 궁궐이 있었는데 절 크기가 궁궐 크기와 비슷했다”고 말했다.

아스카사를 세운 인물은 어제(21회) 소개한 일본 ‘불교 전쟁’에서 승리한 숭불파 리더이자 백제 후손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551?∼626년)이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바로 이듬해인 588년부터 대대적인 불사(佛事)에 착수해 8년 만에 완공했다. 아스카사는 국가가 지은 절이 아니라 소가(蘇我) 가문의 씨찰(氏刹)임에도 불구하고 크기가 궁궐과 비슷했다고 하니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이 절을 지은 사람들도 온전히 백제 장인들이었다. 이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는 ‘아스카사를 짓기 위해 백제에서 건축, 토목, 기와 기술자는 물론이고 화공까지 십여 명의 기술자가 파견됐다’며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장인들 이름과 직종까지 일일이 열거해 놓고 있다.

‘백제에서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혜총·영근·혜시 등 승려, … 사공인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露盤博士)인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능귀문(陵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등과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파견했다.’

여기서 사공이란 지금 말하면 대목장(大木匠)으로 금당, 강당, 회랑, 목탑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노반박사는 탑의 상층부를 제작하는 전문 기술자이며 와박사는 기와 전문가, 화공은 불화, 벽화, 단청 기술자들이다. ‘박사’는 오늘로 치면 ‘명장’을 의미한다.

일본 불교역사서 ‘부상략기’에는 ‘593년 1월 아스카사 목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를 할 때에 소가노 우마코를 필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줬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역시 소가 가문과 백제의 특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떻든 당대 최고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파견하겠다는 결정은 왕이 아니었으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역시 소가 가문이 일본 내에서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당대 백제 권력층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졌을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보탠다.

실제로 백제는 성왕의 대를 이은 위덕왕 대까지 지속적으로 전문 기술자들을 일본에 파견하는데 불교 전쟁에서 백제 후손이 이끈 숭불파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어야겠다는 의도로도 풀이된다고 학계는 전한다.

○ 종합예술을 전수

아스카사는 일본 불교의 공식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건물이자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물이었다. 우에지마 주지는 “일본 최초로 주춧돌을 사용한 초석 건물이자 최초의 기와집”이라고 했다. 그전까지 일본에선 기둥을 땅바닥에 박고 그 위에 집을 지은 뒤 지붕을 나무껍질로 덮는 식이었고 절 맞은편 궁궐도 그런 양식이었다.

아스카사는 주춧돌을 깔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튼튼하면서도 지붕 위에 기와를 얹어 화려함을 더했다. 백제인들이 아스카사를 세운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것은 단지 건물 하나를 세웠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최첨단 건축 문화를 통째로 전해 주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대표적인 것이 기와문화이다.

아스카사를 짓는 데 들어간 기와만도 총 20여만 장에 달하는데 이는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와 일치한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기와 생산은 백제에서 건너온 기와 장인들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게 아스카 절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소가 가문은 기와의 독점 공급처이기도 했다. 우에지마 주지는 “소가 가문에서 다른 사찰에 공급할 기와를 독점해 오다가 가문이 몰락한 후 일본 왕실에서 국유화했다”고 했다.

백제는 기와뿐 아니라 문양까지 전수했다.

일본 고대문화 전성기를 이끈 아스카에서 나라 시대까지 대형 사찰에 쓰인 기와 문양은 대부분 백제 양식이다.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시미즈 아키히로(淸水昭博) 데즈카야마(帝塚山)대 교수는 “백제 기와의 특징이 연꽃인데 사비(부여) 시대가 되면서 낱장이던 꽃잎이 겹장이 되고 씨방이 커진다. 이 양식이 나라 시대에 그대로 유행하게 된다”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없어지니 백제의 마지막 연꽃이 일본에서 활짝 피었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스카사를 지은 결정적 공로자는 백제인들이었지만 일본인들과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앞서 소개한 청동 대불을 주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의 기술력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아스카사를 시작으로 이후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아름다운 대형 사찰을 대거 짓기 시작한다. 시미즈 아키히로 교수는 “아스카사가 완공되고 100여 년 동안 일본에는 1년에 절이 평균 5개씩 만들어질 정도로 사찰 건축 붐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 고구려의 영향

아스카사는 백제뿐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도 받았다. 창건 당시 가람 배치가 1탑 3금당 양식이었는데 이는 평양 청암리 절터와 동일한 것으로, 고구려 양식이 전래되었음을 말해준다. 아스카사에서 살던 최초 승려 중에 백제에서 파견된 혜총과 더불어 고구려인이었던 혜자 스님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에는 아스카 대불을 만들 때에 고구려 대흥왕(영양왕)이 황금 300량을 보냈다는 기록도 나온다.

아스카사는 645년 소가 가문이 몰락하고 서서히 쇠퇴해 갔다. 절의 운명도 대불(大佛)의 운명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1196년 벼락을 맞아 절은 완전히 불탔고 대불도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 대불은 그런 상태로 무려 629년간이나 비바람을 맞으며 방치됐다가 1825년에 이르러서야 80%가 청동과 점토로 복원됐다.

아스카·나라=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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