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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확성기 방송이 위력적인 이유

입력 | 2015-08-27 03:00:00


주성하 기자

남한에서 송출되는 대북 확성기 방송이 들리는 북한 지역 10km 범위 안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종류의 북한군 병사들이 근무한다. 출신 성분이 가장 좋은 간부 자녀들과 출신 성분이 가장 안 좋은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이다.

간부 자녀들은 군사분계선(MDL) 비무장지대 2km 정도 구간의 경비와 수색을 담당하는 민경(민사행정경찰) 부대에서 주로 일한다. 민경의 선발 요건 제1조는 ‘계급적 토대’, 즉 출신 성분이다. 이렇게 따져 뽑다 보면 주로 간부 부모를 둔 자녀들이 선발될 수밖에 없다. 전방에는 민경대대가 10여 개 있고, 대대마다 1800명 정도 배속돼 있으니 민경 전체는 2만 명이 좀 안 된다.

민경은 북한군에서 최상의 대우를 받는다. 최전방 사단에 소속돼 있지만 보급은 평양에서 따로 받는다. 매주 두세 끼 육류를 먹고, 당과류와 필터담배도 공급된다. 명절 때마다 꿩고기 사탕 귤 등이 담긴 선물박스가 전달된다. 외출 때 장교복을 입고 나가는 특권도 보장되며 제대하면 공산대 졸업증을 받고 곧바로 간부로 등용된다.

반면 민경부대 약 1km 후방에 있는 ‘1제대’ 부대엔 출신 성분이 나쁘고 가난한 집 자녀들이 주로 간다. 부모들은 자식을 배고픈 고생이 덜한 국경경비대나 해안경비대 같은 좀 나은 부대로 빼돌릴 연줄도 돈도 없다. 1제대에 속하는 최전방 1, 2, 4, 5군단 병사들에 대한 보급은 최악이다. 3년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크 귀순’ 사건의 당사자가 귀순 후 “배가 고파 칡뿌리를 캐 먹었고 소금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오랜만에 맛본 소금에서 단맛이 났다”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특히 강원도 1, 5군단은 피복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신발 밑창에 나무껍질을 덧대고 다니는 병사도 적지 않다.

김정은 시대 들어 1제대 군단들은 더욱 홀대를 받고 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체제의 최대의 적은 미제나 남조선이 아니라 탈북자”라고 공언한 뒤 북-중 국경을 분계선처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에 최근 북-중 국경이 전기철조망으로 봉쇄되고 지뢰까지 매설된다는 정보도 있다. 식량과 피복 등 군수물자는 국경경비대에 우선적으로 공급된다.

전방 군단이 홀대받는 이유는 북한군의 전력으로 남침하기엔 어림도 없고 그렇다고 한미 연합군이 북진해 올라올 일도 없다는 것을 김정은이 잘 알기 때문이다. 5중의 전기철조망과 조밀한 지뢰밭에 민경까지 지키고 있어 병사들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탈출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분계선 남쪽 비무장지대 한국군 경계초소(GP)와 일반전초(GOP) 사이에 위치한 대북 확성기 방송은 이런 두 부류의 병사들에게 외부 소식을 전해준다. 방송 내용은 2004년 중단하기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지만 그 위력은 11년 전에 비해 몇 배로 더 커졌다. 청취자인 북한 병사들이 ‘장마당 세대’로 완전히 구성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사사전에도 올라온 ‘장마당 세대’는 ‘국가 배급망이 붕괴된 이후 태어나 국가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세대’이다. 이 세대의 또 다른 특징은 간부 자녀든, 가난뱅이 자녀든 대북 방송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래에 북한 사회를 휩쓴 한류의 주 소비자가 바로 간부 자녀들이다. 한국 제품을 가장 선호하는 부모들 밑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 말투를 따라 한 세대가 현재 민경에서 근무한다. 이들의 머릿속에 한국은 부유하고 자유로운 곳으로 각인돼 있다.

1제대 병사들은 부익부빈익빈이 고착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체제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충성심이 매우 희박하다.

이런 병사들에게 김정은 체제의 실상을 전달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들이 당장 폭동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입장에선 체제를 지키라고 보낸 수십만 명의 병사가 10년 넘게 반동으로 세뇌돼 제대한 뒤 전국에 흩어지는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민경 병사들은 미래의 북한 간부이기도 하다.

기를 쓰고 탈북하는 북-중 국경경비대만도 골치가 아픈데, 남쪽에서까지 체제 불만 세력이 자란다면 북한 체제는 어떻게 될까.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되자마자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급히 달려와 사활을 걸고 회담에 매달린 것엔 이런 사정이 숨어 있다. 북한이 이번에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다고 안심할 순 없을 것이다. 북한이 점점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거짓의 누각은 진실이 파고들수록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대북 확성기의 위력도 커지게 될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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