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원 논설위원
만천하에 노출된 약점
8·4 지뢰 도발과 8·20 포격 도발에 이어 대남 전면전까지 거론하며 위협했던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전체주의 국가를 장악한 자신과, 유럽대륙을 전쟁 공포로 떨게 했던 2차 대전 전야의 히틀러를 동일시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남북 간 긴장 고조에 이은 8·25 대화 합의와 관련해 “김정은이 처음으로, 그것도 전 세계에 자신의 약점을 보여준 셈”이라고 썼다. 대북 확성기를 통해 멀리 북한 내부까지 전달되는 메시지가 북한군과 북한 주민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사실에 북한 지도부가 큰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측 대표인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은 평양으로 돌아가자마자 TV에 나와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 일방적 행동으로 상대 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였다”며 다시 도발 자체를 부인했다. 결국 대북 확성기를 끄기 위해 대한민국에 사기를 쳤거나, 우리 대표단에 사과를 표명하고도 북에 돌아가 ‘최고존엄’을 속이며 양봉음위(陽奉陰違·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며 속으론 딴마음을 먹음)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진보 성향 학자들은 정부가 금강산관광 재개와 5·24조치 해제 등 대북교류·협력에 속도를 내고 정상회담까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채근하고 있다. 제1야당 부대변인이라는 사람은 더 나아가 페이스북에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존경한다”고 했다가 사퇴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쓸모 있는 바보, 감동하다
김 위원장에게 쉽게 감동하고 쉽게 믿을 준비가 돼있는 ‘쓸모 있는 바보들’을 경계라도 하듯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천안함 폭침에 대해 북한이 제3자적 입장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것을 우리가 수용했다면 남북정상회담은 이미 성사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북한의 태도를 바꿀 수 없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