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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사탕수수 농장서 번 돈으로 임정 후원

입력 | 2015-08-28 03:00:00

[2030 순례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가다]<中>美하와이 이민자들의 투혼




27일 미국 하와이 한국독립문화원에서 순례단원들이 하와이 교민들이 1970년대 기독운동 때 사용했던 태극기를 살펴보고 있다. 하와이 교민들은 1920, 30년대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번 돈을 모아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 의거 등을 후원했다. 호눌룰루=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한국에서 7000km가량 떨어진 섬 하와이. 일제강점기에 제물포항에서 배로 보름 넘게 항해해야 닿았을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벌어졌다.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국가보훈처,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2030세대 독립과 미래창조 순례’에 참가한 순례단원들은 26, 27일(현지 시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곳곳에서 조용하지만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 이봉창 의사 거사 자금은 하와이 후원금


27일 오전 순례단이 호놀룰루 시 중심가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언덕 정상의 한국독립문화원을 찾았을 땐 기온이 섭씨 33도를 웃돌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였지만 순례단원들은 문화원에 전시된 한인 교민들의 활동상을 둘러본 뒤 불평을 접었다. 연평균 최고 기온이 29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독립운동 후원금을 모았던 1900년대 초 교민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민 1명이 낸 후원금은 연간 5∼10달러였다. 농장 월급이 15∼20달러였으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교민들은 “하와이가 8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으니 이곳에서 번 돈을 조선 팔도를 살리는 데 쓰자”며 뜻을 모았다고 한다. 후원금은 1903년경부터 결성되기 시작한 항일민족주의 단체들을 통해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 보내졌다.

후원금은 무장투쟁부터 비폭력운동까지 폭넓게 쓰였다. 김구 선생(1876∼1949)은 백범일지에 1932년 이봉창 의사(1901∼1932)의 수류탄 투척 의거와 관련해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준 돈이 거사를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기록했다. 한인애국단이 이봉창 의사에게 보낸 최후의 거사 자금 300원(현재 가치로 약 600만 원)의 출처도 하와이 교민의 후원금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1875∼1965)이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할 때도 하와이 교민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김희량 씨(21·여·한동대 국제지역학과) 등 순례단원들은 하와이 교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26일 매컬리-모일리일리 하와이주립도서관을 방문해 한국어 서적 10권을 기증했다. 2013년 한국어관이 생긴 뒤 고국을 그리워하는 교포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김 씨는 “제대로 된 집도 없이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을 도운 마음을 깊이 새기겠다”고 했다.

○ 꽃피우지 못한 하와이 내 독립운동


영화 ‘암살’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 피스톨’은 하와이를 일제 식민지배나 독립운동과 무관한 평화로운 이상향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실상과 거리가 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영사관의 압박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하와이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운동을 벌였다.

호놀룰루 시 포스터 공원 인근에는 박용만 선생(1881∼1928)이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한 ‘대조선 독립단’의 터가 있다. 박 선생은 이곳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 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장정 240여 명은 마땅한 훈련 장소가 없어 한인 출신 농장주가 운영하는 파인애플 농장을 빌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나무총을 휘두르는 ‘주경야련(晝耕夜練)’을 이어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비폭력 투쟁의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 뒤 한인중앙학원과 한인여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사업에 나섰다. 학교 터에는 현재 초등학교가 지어져 있다.

하와이 내의 독립운동이 꽃을 피우진 못했다. 노선이 달랐던 박 선생과 이 전 대통령이 갈등한 탓도 있지만 일본 측의 압력도 독립운동을 위축시켰다. 1920∼1930년 하와이 내 일본 이주민은 한인(4500여 명)보다 십수 배 많은 7만∼8만 명이었다. 일본 영사관은 한인들에게 도항(渡航) 허가서를 발급해주지 않거나 농장 취업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독립운동 움직임을 억눌렀다고 한다.

또 사적지 상당수는 현지 가이드조차 잘 찾지 못할 정도로 과거의 흔적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조선 독립단 터에는 주차 빌딩이 세워졌고, 이 전 대통령이 처음 정착한 주택 터엔 일반 가정집이 들어서 있다. 순례단 임성호 씨(24·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는 “기회가 된다면 사적지 앞에 표지판을 세워 일반 관광객도 하와이 교민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 공동묘지에 묻힌 ‘주부 독립운동가’들

27일 오후 방문한 호놀룰루 시 오아후 공동묘지에서는 항일단체 중앙부장을 맡았던 김노듸 여사(1898∼1972) 등 적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하와이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던 한인 총각들이 보낸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온 결혼 이주 여성들이다. 교육 수준이 높아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일반 묘지에 잠든 독립운동가들의 명부를 작성해 하와이 독립운동사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생몰 시기는 물론이고 독립운동의 행적이 적혀 있는 비석은 그 자체가 훌륭한 사료라는 것이다. 묘지 관리인 오창복 씨(66)는 “30여 년간 묘지를 지키다 보니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진 책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호놀룰루=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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