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YS “평양 가서 김일성 만나겠다”… 전쟁위기서 극적 반전
1994년 6월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타격 가능성까지 제기되던 상황에서 전격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담판을 통해 극적인 핵개발 중단 약속을 이끌어 냈다. 왼쪽부터 카터 전 대통령 부인 로절린 여사, 김일성, 카터 전 대통령, 김일성 부인 김성애. 동아일보DB
1994년 6월 16일. 정종욱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귀를 의심했다. 그의 사무실을 찾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는 그 발표가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줄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사흘 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다. 두 달 전 4월에는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8000여 개를 꺼내 재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서겠다는 위협이었다. 이미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으로부터 미군의 영변 원자로 폭격 가능성과 한반도 무력 증강 계획을 들은 정 수석은 사색이 됐다. 미국인이 대피한다는 것은 한반도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대국민 메시지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놀란 김 대통령이 레이니 대사를 다시 집무실로 급히 불렀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일방적인 대피 계획 발표를 연기하세요!”
그날로 한미 정상 간 통화가 성사됐다. 김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발표 계획은 일단 보류됐다.
당시 북한이 폐연료봉 추출에 속도를 내면서 미국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페리 국방장관은 영변 핵시설만 파괴하는 ‘외과수술식 타격(surgical strike)’이 가능한지 알아볼 것을 미 합참에 지시했다. 미 군함이 동해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발사하면 된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영변을 타격하면 북한이 휴전선 인근의 장사정포 다연장포로 수도권을 포격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도 함께였다. 페리 장관은 북한의 반격을 막기 위해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6월 16일은 미 국방부가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그날이었다.
하루 전인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해 방북했다.
당시 미 행정부의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들은 전부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반대했다. 한국의 태도는 달랐다. 정 수석에 따르면 청와대는 한승수 당시 주미대사를 카터 전 대통령의 고향인 미국 애틀랜타로 급파했다. 김일성을 만나기 전 남북관계 상황과 정부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한 것.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에서 카터 전 대통령을 배웅했다. 김 대통령은 “위기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풀 수밖에 없다. 필요하면 평양에서 만나도 좋다. 김일성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을 만나 IAEA 사찰단을 추방하지 않고 영변 원자로에 새 연료봉을 넣지 않음은 물론이고 꺼낸 폐연료봉을 재처리하지 않겠다는 답을 받았다. 남북 정상회담도 합의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는 순식간에 외교 협상 국면으로 바뀌었다.
그해 6월 초 한승주 당시 외무부 장관은 중국 베이징에서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과 탕자쉬안(唐家璇) 부부장을 만났다. “중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상황까지 가지 않으려면 북한이 중국의 거부권을 기대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6월 12일 장틴옌(張庭延) 주한 중국대사가 알릴 게 있다며 급히 한 장관을 찾았다. 그는 탕 부부장이 6월 10일 주중 북한대사에게 통보한 내용을 한 장관에게 전했다. ①중국은 북한의 핵 연료봉 인출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한다 ②국제사회의 규탄에 대해 더 이상 북한을 변호하기 어렵다 ③핵에 대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중국은 안보리 제재 결의안 통과를 막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에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중국은 이를 한국에 먼저 알렸고 한국이 미국에 통보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당국자는 “중국이 1993∼1994년 1차 북핵 위기에서 소극적이었다는 세간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며 “김일성이 카터 전 대통령을 불러들여 ‘통 큰 결단’을 한 데는 중국의 압력도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해 7월 8일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 기회는 놓쳤지만 김일성-카터 합의는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북한발 위기를 외교로 넘으려 한 한국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 평양 훈령받은 北 “서울을 불바다로” ▼
장면 1: 북핵위기 속 남북회담 일촉즉발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특사 교환을 위한 8차 실무회담이 결렬된 뒤 북측수석대표 박영수(오른쪽)가 남측 수석대표인 송영대 통일원 차관의 시선을 외면한 채 형식적인 악수를 하고 있다. 박영수는 이날 회의 도중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다. 동아일보DB
북한은 1993년 10월 1차 회담 때부터 특사 교환과 상관없는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 공조 포기’만 되풀이했다.
한국 대표인 송영대 당시 통일원 차관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회담 시작부터 북한을 강하게 비판했다.
송 차관의 발언 도중 북한 대표 박영수 뒤에 있던 수행원이 박영수에게 슬며시 쪽지 1장을 건넸다. 박영수는 책상 밑으로 쪽지를 내려 스윽 보더니, 회담 테이블 위해 놓인 서류 중 한 장을 들었다. 송 차관을 응시했다.
“송 선생 여기서 멈추시오. 내가 중대한 제안을 하겠소.”
그러고는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핵문제와 관련한 남측의 국제공조 구축은 북한의 목을 조여 오는 것과 같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우리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불바다가 되면 여기 앉아 있는 송 선생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오!”(박영수)
“우리 측을 향한 선전포고이군요. 강력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소.”(송 전 차관)
그러자 박영수가 성을 더 내며 비난을 계속했다. 뒤에 앉아 있던 수행원이 박영수에게 다시 쪽지를 전했다.
쪽지를 읽은 박영수는 갑자기 “우리 할 말 다했으니 일어납시다” 하고는 일방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이었다. 한국에 전쟁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은 ‘서울 불바다’ 발언 몇 개월 뒤 미국 방송 CNN과의 인터뷰에서 “불바다 발언은 우리 대표가 지나쳤던 것 같다. 우리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송 전 차관의 말을 들어보자.
“박영수는 몇 달간 회담에서 기조 발언 이외에는 원고 없이 말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평양에서 준비해온 원고를 쪽지 지시에 따라 꺼내 읽었다. 김일성의 결재를 받은 것이었다.”
▼ “美와 전쟁날 상황… 오빠가 보고 안해” ▼
장면 2: 다급히 김일성 찾아간 딸 김경희
1994년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을 꺼내 재처리하겠다고 밝혀 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6월 어느 날.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급히 아버지 김일성을 찾았다.
“지금 큰일 났어요. 오빠가 보고를 안 해서 아버지가 상황을 몰라요. 인민들은 굶어죽고 있고 미국과 전쟁 나게 생겼어요. 빨리 아버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해요.”
정종욱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정부가 이런 첩보를 입수했었다고 28일 밝혔다. 사실상 북한을 움직이는 실권은 이미 김정일이 장악한 상태였다.
1994년 6월 15일 방북해 김일성과 만나고 한국에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 정부에 김일성이 “내가 2선에 물러나 있었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으로 1선에 복귀했다”고 말한 사실을 전했다.
송영대 당시 통일원 차관은 묘향산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전념하던 김일성이 그해 7월 8일 갑작스레 사망한 원인에 대한 정부의 분석을 들려줬다.
“김정일이 묘향산 별장으로 찾아와 김일성에게 정상회담은 문제가 많으니 하지 말라고 요구해 부자가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벌였다는 첩보를 정부가 입수했다. 고령에 회담 준비로 쌓인 피로에 아들과의 심한 갈등이 겹쳤을 것이다.” 정부는 김일성 사망 전날 평양에서 의료진을 태운 헬리콥터 2대가 급하게 묘향산으로 향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