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
《 국가 지도자에게서 모처럼 책 이야기가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초 국무회의에서 “이번 여름휴가 중에 읽은 책들 중에서 특히 마음으로 공감하는 책이 있었다”면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을 언급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우수성과 가능성에 대해 잘 기술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이 13일 국정과제세미나에서 “무슨 일이 외교적으로 생겼다 하면 ‘아이고, 또 우리나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자체가 우리나라 국격에도 맞지 않고 패배 의식”이라고 한 말도 이 책 속에서 나왔다. 대통령 언급이 있은 뒤 2년 전에 나온 이 책은 단박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저자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를 25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만났다. 》
신연수 논설위원
“미국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처럼 고전문학을 전공한 사람에 대해선 미국 대통령이 신경 안 쓴다.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해 별다른 역할을 하기 어렵다. 한국에 문화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고 사회적 컨센서스가 있으니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말한 후 달라진 게 있다면….
“대통령이 말하고 4일 후 인사혁신처에서 공무원 교육을 제안하는 전화가 왔다. 지난주부터 경기 과천시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특강을 하게 됐다. 한국인들은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성장과 민주화가 1970년대 이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랜 과학기술 전통, 조선시대 의정부 춘추관 같은 우수한 행정과 향교 서원 등의 교육시스템, 투명한 정부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지식인 등 오랜 민주주의 전통이 발전의 바탕이 됐다. 한국인 스스로 유교나 조선왕조를 비하하는 것은 일본 식민지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조선처럼 하나의 왕조가 500여 년을 유지한 것도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고대에는 이집트가 있었지만 근세에는 조선과 오토만제국밖에 없었다. 조선이 오토만보다 안정적이었다.”
―책을 보면 겉으로는 한국을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날카로운 비판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왜 훌륭한 전통과 역사에 대해 그렇게 무지한가, 잘살게 됐으면서 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이 없는가 같은 문제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아시아에서 등장할 또 다른 1등 국가는 한국이다’라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나.
“출판사에서 그런 부분을 키운 점이 있다(웃음). 한국은 1등 국가가 될 조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1등 국가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한국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국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했지만 안타깝게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금속활자 개발의 공은 유럽인에게 넘어갔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세계로 나아가기를 주저함으로써 스스로 한계를 초래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유 정체성 살리면 르네상스 가능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한국이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려면 창의성을 꽃피워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써 발현할 수 있다고 했다.
“르네상스가 대표적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뛰어난 근대 유럽 문명을 만들어낸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에 위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유럽은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다시 살려냄으로써 훌륭한 근대문화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가 없다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한국이 특히 그렇다. 현대적이고 정교한 기술과 문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높은 차원의 새로운 창조가 잘 안 된다. 비슷한 수준의 아이디어만 반복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를 하려면 자신 있게 해야 하는데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안 된다. 과거의 재발견은 한국이 창조적 발전을 추구할 때 미래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의 보수는 돈 버는 일만 관심
―한국인들이 ‘새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은 실제로 미국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 사이에 낀 새우 아닌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처신해야지 새우가 고래 흉내를 내면 살아남기도 어렵다.
“우리 어머니의 조국인 룩셈부르크는 경기도보다 작다. 유럽 강국인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지만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럽연합이 출범하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유럽 평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룩셈부르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9만6000달러로 세계 1위고 국민 개개인의 교육 문화 수준이 매우 높다. 한국도 200여 년 전 영·정조 시대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중일 사이에 지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한국이 주도해 동북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비판했는데….
“한류 드라마를 보면 큰 집에서 살고 큰 차 타고 낭비하고 살면 행복하다고 보는 것 같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뭘 배우겠나. 천박하고 표피적인 문화는 오래갈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부 한국의 재벌처럼 산다면 지구는 버틸 수 없다. 드라마에는 가족 윤리나 사회적 책임도 없다. 성형수술도 필요한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손재주를 꼭 그런데 써야 하나. 선진국들이 기술이 없어서 성형수술을 확산시키지 않는 게 아니다.”
―가치관이 보수적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와 비슷하다. 요즘 한국인들이 말하는 보수와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너무 다르다. 지금 한국의 보수는 개발하고 돈 잘 벌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다. 옛날 한국의 선비들은 자연을 존중하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엄격한 윤리의식이 있었다. 나는 환경을 중시하는데 지금은 이것이 진보라고 하지만 원래는 조선시대 보수의 가치다. 낙태도 매우 심각한데 한국은 어떤 신문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낙태를 줄이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서도 민주주의 퇴보 여전
―2012년에 쓴 ‘세계의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를 보면 한국이 빈부 격차, 복지 문제, 언론 탄압, 민주주의 퇴보 같은 이슈를 안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나아졌다고 보나.
“좋아지지는 않았다. 아마 박 대통령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정치는 국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정치인을 뽑아 놓고 내 할 일 다 했다 방치해버리면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진 정치인이 있어도 시민이 무관심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좋은 사례다. 국민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많이 내놨지만 국민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니 실현하기가 힘들다.”
―‘한류가 위기다’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케이팝 같은 한류문화를 보면 흥겹지만 표피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만주족을 보자. 만주족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컸고 중국 본토까지 정복해 청나라를 세웠다. 당시 경제 행정 대중문화면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만주족의 나라는 사라지고 없다. 한국이 홍익인간 선비정신 유교 불교, 이런 깊은 사상과 철학을 버리고 뿌리 없이 표류하는 대중문화만 좇다가는 만주족처럼 될 수 있다. 중국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조선은 친환경 농업, 한양의 도시설계, 조선왕조실록 편찬 등에서 100년, 500년을 내다봤고 실제로 성공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2년에서 5년 앞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멀리 보고 행동하는 것이 지금 한국에 필요하다.”
::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
정약용-박지원 사상 심취… 허생전등 10권 영어 번역
1964년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 출생. 예일대에서 중문학 학사, 일본 도쿄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우송대 솔브릿지 국제경영학부 교수를 거쳐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겸 아시아연구소장으로 있다.
한국인 부인을 둔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장인이 지어준 이만열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그런데 중국어와 일본어는 더 잘한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20대에 배웠고 한국어는 늦게 배우기 시작해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며 부끄러워했다. 한문학 전공이라 한자 실력도 상당하다. 일본에서 7년 살았고 대만에서도 유학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세계의 석학들, 한국의 미래를 말하다’ 등의 책을 펴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 양반전 등 10권 전권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동양의 선비, 특히 한국의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가졌고 당시 서민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들을 창안해냈다는 점이 다산을 존경하는 이유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