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사진부 차장
무박 4일 43시간의 협상을 마친 김관진 대통령국가안보실장은 서울로 돌아와 25일 오전 2시 3분에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정부는 통일부 직원이 찍은 김 실장과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의 악수 사진을 언론사에 제공했다. 이날 아침 서울 중심가에 배달된 조간신문에는 이 사진이 게재됐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남북의 합의사항을 오전 2시 정각에 발표했고 25일 아침 노동신문은 사진과 해설 없이 합의문을 실었다.
한국의 방송이 하루 종일 각계 전문가들의 설명을 곁들인 보도를 이어가던 중 황병서가 25일 오후 5시 조선중앙텔레비전에 나왔다. 그는 ‘남조선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가지고’라는 식의 해설을 곁들여 지뢰 도발 자체를 부인했다. 북한의 협상 책임자가 북한 방송에 나와서 브리핑 형식으로 협상 내용에 ‘북한 측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기자회견장에서는 사진기자들이 연설자가 손동작을 하거나 말을 하는 순간 플래시를 터뜨린다. 물론 패배자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피사체가 입술을 깨물거나 고개를 숙인 순간을 포착하기도 한다. 북한 브리핑에서는 황병서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도 계속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마치 기계가 플래시를 자동으로 터뜨리는 것처럼. 앵글도 전경과 클로즈업을 반반씩 섞어서 한국 국방부 발표 화면과 유사하게 보인다. 굳이 황병서가 이례적인 형식으로 방송에 출연한 이유는 뭘까?
평양의 실력자들이 한국의 종합편성TV와 공중파 방송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위성과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스타일의 영상을 전달받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단조로운 방식의 화면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북한 내부의 변화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외국 생활을 경험한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했던 브리핑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메시지 역시 김정은을 위한 내용은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북한의 주장과 해석을 기다리는 남측의 일부 여론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도 있을 법하다. 한국의 기자회견과 브리핑을 흉내 낸 북한의 동영상. 남남갈등을 유발하기 위한 선전술의 진화라는 생각이 든다.
변영욱 사진부 차장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