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9월호/생활정치의 달인] 재혼의 정치학 요즘엔 이혼도 많이 하고 재혼도 많이 한다. 재혼은 초혼만큼이나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결혼식을 할 것인지 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잘못 판단하면 본인의 삶, 새 배우자와의 관계, 사회생활, 자녀관계, 노후가 다 꼬인다.
러시아 닮아가는 한국
최근 이혼이 늘어나면서 재혼도 동반 증가세다. 2014년 전체 혼인 30만5500건 중 21.6%인 6만6000여 건은 커플 가운데 1명이 재혼인 경우다. 결혼하는 부부 5쌍 중 1명이 재혼이라는 뜻이다. 평균 재혼연령은 남성 47.1세, 여성 43.0세. 평균 이혼연령은 남성 46.5세, 여성 42.8세다. 재혼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혼 1년 이내에 재혼한다고 볼 수 있다.
재혼이 이처럼 흔해지긴 했지만, 재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초혼보다 주변의 시선을 더 의식해야 한다. 사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한 차례 결혼에 실패했다는 낙인이 알게 모르게 생기기도 한다. 실패의 상처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두 번째 결혼은 성공해야 한다는 사명의식도 갖게 된다. 당연히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리고픈 욕망
그러나 이혼과 재혼이 늘면서 이런 고정관념도 차츰 변하고 있다. 이혼은 실패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된다. 실패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또는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엔 시간을 되돌려 사랑을 만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나 삶을 다시 살아보고픈 욕구가 있다.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과 산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결혼생활이 불행한 이에게 이혼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다. 재혼 역시 마찬가지다.
교황의 한마디
살아보고 결정하겠다?
이혼과 재혼에 대한 인식은 변하고 있지만, 아직은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보니 많은 재혼 커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동거) 상태로 지낸다. 2010년부터 5년간 선고된 사실혼 부당파기 소송 141건 가운데 45.4%인 64건이 재혼이다.
재혼 커플이 법률혼보다 사실혼을 선호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 초혼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 아래, 일단 살아보고 법률혼으로 갈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기가 용이하기도 하다. 최근 초혼에서도 ‘동거 후 결혼’이 늘어나는 추세다. 재혼에선 이것이 대세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헤어지고 난 뒤 결혼한 것이 아니라 연애만 한 것이라고 우길 수 있는 장점(?)까지 겸비했다.
연애 따로, 재혼 따로
재혼 전략에서 이러한 ‘선 사실혼, 후 법률혼’은 권장할 만한 대안이다. 다만 소속감이 약하다는 단점은 남는다. 밀고 당기는 연애감정의 긴장도를 유지할 수는 있겠으나, 재혼으로 얻고자 하는 안정감을 확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2015년 6월 한 재혼정보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일상생활 중 재혼 욕구가 가장 강하게 느껴질 때는 ‘남은 인생을 생각할 때’ ‘정서적 불안감을 느낄 때’ ‘생활이 힘들 때’다. 특히 여성은 아무래도 남성의 ‘노후 고정 수입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은 일생 동안 정신적 · 질적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욕구가 재혼으로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재혼에서도 역시 ‘조건’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애 따로, 결혼 따로’는 초혼보다는 재혼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른다.
결국은 애정의 문제
반복되는 악몽
정신적 · 물질적 안정을 얻으려고 재혼을 했는데, 상호 신뢰가 약하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신뢰가 떨어지면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언젠가 내 곁을 떠날지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계속 의심한다’ 이런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방어적으로 변한다. 이런 불신의 악순환이 이어지면 재혼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상태가 된다. 당연히 파국으로 치달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아니면 어느 일방이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재혼은 악몽이 된다. 안 하느니만 못한 재혼이고 반복되는 악몽이다.
박찬숙 vs 조혜련
전 국가대표 여자농구 선수 박찬숙 씨는 “재혼이 다 행복한 것만은 아니란 걸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다. 그냥 재혼 안 하고 연애하고 싶다”는 소회를 남겼다. 반면 개그우먼 조혜련 씨는 “재혼 후 행복지수가 100점이 됐다”고 말했다. 재혼을 고민 중인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엇갈린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불행해질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더 현명한 중년의 전략인지 모른다.
혼전계약서 꼭 써라
억지로 신뢰를 만들려면 가식을 떨어야 한다. 신뢰가 생기길 기대하면서 무한정 기다릴 수만도 없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이 혼전계약서, 부부재산약정서등기제도다. 민법 제829조에 엄연히 법적 근거까지 규정돼 있다. 아직 이 제도를 활용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2003년 3건이던 등기 건수는 2014년 28건으로 늘었다. 보통 혼전계약서에 부부재산약정등기를 포함시킨다.
“이혼 두 번에 재산 4분의 1토막”
이혼을 경험한 남성 중 많은 이는 “재산의 절반을 전처에게 떼줬다”고 말한다. 과장도 섞였겠지만,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어떤 남성들은 “이혼 두 번 하면 재산이 4분의 1토막 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한다. 잦은 이혼은 노후 생계까지 위협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재혼 후 다시 이혼하려 할 때 자신의 재산을 보장받는 유력한 방법이 혼전계약서와 부부재산약정등기 같은 장치다. 따라서 ‘이런 것까지 작성하며 유난을 떨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작성해두는 게 좋다. 김대중과 김종필은 DJP 연합을 하면서 내각제 합의각서를 썼다. 정권을 잡은 뒤 김대중은 이 각서를 어겼다. 그래도 김종필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정치 행위를 심판해줄 법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전계약서를 보호해줄 법원은 있다.
아나운서 김주하의 경우
가족계약서를 별도로 작성할 수도 있다. 여기엔 가사 분담, 귀가 시간, 외식 빈도, 기념일 챙기기, 심지어 부부관계 횟수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부부재산약정등기만큼 법적 보호를 받진 못한다. 아나운서 김주하 씨는 이혼소송 과정에서 다시 외도를 하면 모든 재산을 주겠다고 한 남편의 각서를 제출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리적 가이드라인으로서 역할을 기대할 수는 있다.
진짜 믿나, 믿는 척하나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지난해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혼 여성의 63.2%는 “결혼 전 혼전계약서 작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면에 남성의 54.9%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혼전계약서가 필요한 이유로는 “결혼 후 서로의 인격 존중을 위해”를 꼽았다. 역시 미혼이므로 혼전계약서에도 낭만적으로 접근한다. 재혼을 앞둔 남녀는 그 필요성을 더 절감해야 한다. 속으론 믿지 않으면서 겉으로 믿는 척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더 확실하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새엄마, 새아빠 싫어”
재혼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가족의 반대다. 초혼 때는 부모의 반대가 결정적 악재로 작용한다. 재혼 때는 부모보다 자녀의 반대가 더 크게 작용한다. 나이가 어린 자녀는 감정적으로 거부한다. 그냥 새엄마, 새아빠가 심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 주위의 몇몇 이혼남은 “자녀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재혼을 미루겠다”고 말한다. 자녀가 입시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재혼 문제로 공부를 망칠까 염려하는 것이다.
성직자 같은 아버지
이들은 그 몇 년간 ‘성직자 같은 아버지’로 자녀에게 비치려 애쓴다. 이는 자기 희생이 필요한 일로, 외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수 상황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에게 “그러지 마라”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엔 ‘입시’와 ‘재혼’에 관한 특별한 인식과 문화가 존재한다. 자녀들도 이를 공유한다. 이러한 인식과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국 이에 순응하는 것도 삶을 지혜롭게 사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유산 줄어들까 우려
성인 자녀는 이성적으로 부모의 재혼을 반대한다. 물려받을 유산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이가 법률혼 재혼을 포기하고 동거를 택하기도 한다. 사실 동거가 나쁘진 않다. 꼭 재혼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 자식 간 관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의사를 관철하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임시로 봉합할 수는 있을지언정 승복시키긴 어렵다. 다시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다. 일부 재혼 가정에선 유산 문제로 남편 쪽 자녀와 아내 쪽 자녀가 갈등을 빚곤 한다.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서로 많이 차지하려 한다. ‘우리 집은 화목하므로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일 수 있다. 최근 롯데가(家) 형제의 난에서도 보듯, 재혼에 삼혼이 더해지면 자녀 간의 갈등 양상은 훨씬 복잡해지고 유산 싸움은 더욱 치열해진다.
자녀에게 끌려다니지 말라
차선책은 이것 또한 계약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유언서를 공개하는 한편, 부부재산약정서를 포함한 혼전계약서도 공개하는 방법이다. 배우 윤문식 씨는 재혼을 하려 하자 자녀들이 반대해서 재산을 미리 나눠줬다고 했다. 여기에는 재혼 상대방의 이해와 지지가 따라야 한다. 재혼의 가장 큰 사유 가운데 하나가 물질적 안정이다. 그런데 이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굳이 그 사람과 재혼할 까닭이 없다.
권력의지와 이기심
재혼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자녀에게 재산을 미리 준다? 글쎄다. 그런 드센 자녀가 재산을 챙긴 뒤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할지는 의문이다. 새 배우자에게 끌려다녀서도 안 되지만 자녀에게 끌려다녀서도 곤란하다. 그러다간 자칫 가진 것 다 내놓고 노후를 외롭게 가난하게 보내게 될지 모른다.
권력의지가 없는 정치인은 성공하지 못한다. 재혼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으로 처신해야 한다. 그래야 새 배우자든 자식이든 주변이 따라온다.
이종훈 | 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