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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 화가와 배우, 사실과 꿈의 경계 허물다

입력 | 2015-09-01 03:00:00

일민미술관 조덕현 개인전 ‘꿈’




한지에 연필로 그린 ‘할리우드 에픽―그레타 가르보’ 앞에 선 조덕현 작가(왼쪽)와 조덕현 배우. 가르보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 ‘허구의 조덕현’ 사모한 첫사랑의 얼굴을 합성해 그렸다. 얼굴 모델은 조작가의 딸이다. 나씽스튜디오 제공

《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조덕현’을 검색해 보자.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한 48세 배우가 1순위다. 바로 아래 10년 연상의 미술작가가 나온다. 조덕현 작가(이화여대 서양화전공 교수)는 지난해 어느 날 무심코 자기 이름을 검색했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엔 내가 1순위였는데…. 밀렸네.’ 동명이인의 각양각색 삶 이야기를 끌어 모아 작품 재료로 써 볼까. 두루뭉술한 생각을 품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우선 배우 조덕현부터 만났다. 성품이 비슷해 몇 번 거듭 편하게 만나 술잔을 나누다가 문득 ‘가상의 조덕현 스토리를 새로 만들어 보자’는 발상이 떠올랐다. 》
 
10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조 작가의 개인전 ‘꿈’은 그렇게 농담처럼 지나치던 상념을 붙들어 진지한 실물에 입혀낸 작업의 결과물이다. 유쾌한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어느 구석에도 장난기가 없다. 허구의 인물과 작가, 배우 각각의 자아가 회화, 영상, 설치 작업 곳곳에 산재한다. 내포한 이야기는 유연하면서도 견고하다. 일상과 예술 작업의 경계가 말없는 실천으로 근사하게 허물어졌다.

거울로 둘러싸인 전시실에서 상영하는 ‘조덕현 이야기’. 배우 조덕현이 허구의 조덕현을 연기했다. 나씽스튜디오 제공

전시실은 허구의 조덕현 일대기를 조명하는 공간이다. 대략적 구상을 소설가 김기창 씨에게 의뢰해 단편소설 ‘하나의 강’으로 펴냈다. 주인공 조덕현은 1914년 태어나 1995년 사망한 것으로 설정했다. 소설은 “날마다 소주를 반병씩 마시는데 이미 마신 걸 잊고 또 마시길 거듭하는” 그의 말년 어느 하루 이야기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영화계에서 스태프 겸 단역배우로 잠깐 활동한 주인공은 평생 그 짤막한 기억의 불씨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길에서 젊은 남녀와 다투다 경찰 조사를 받고 돌아와 비에 젖은 몸을 낡은 솜이불 아래 구겨 넣은 밤. 미화되고 부풀려진 추억이 성냥팔이 소녀가 본 환영처럼 그의 주변을 떠돈다.

전시실 복판에 꿈틀거리듯 뒤척이는 이불 속 조덕현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돌아간다. 배우 조덕현이 연기한 영상이다. 옆에는 허구의 조덕현이 말년을 보낸 서울 변두리 쪽방 공간을 재현했다. 방 안의 이불, 주전자, 그릇, 밥상은 조덕현 작가가 작업실 근처에서 만난 홀몸노인에게 빌려왔다. 조 작가는 “삶의 본질은 기억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붙드는 젊은 시절 꿈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현실과 대비되는 과거,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추억의 흔적을 ‘현실 속 비현실’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배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에픽―키드 갈라드.’ 1937년 만들어진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을 배우 조덕현으로 바꿨다. 일민미술관 제공

벽면은 영화 속 한 장면을 보고 한지에 그린 연필화로 채웠다. 한국 영화 ‘청춘쌍곡선’과 ‘이 생명 다하도록’, 할리우드 영화 ‘키드 갈라드’ ‘카사블랑카’ 등의 스틸 컷이다. 김진규, 버스터 키턴,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을 배우 조덕현의 얼굴로 바꿔 그렸다. 배우 조덕현은 사진 속 원작 배우의 모습을 본 뒤 카메라 앞에 서서 나름의 해석대로 연기했다. 이틀 동안 수백 장을 촬영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건 그 일부다.

사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번 전시는 작업에 참여한 배우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배우 조덕현 씨는 “처음에는 그저 스토리텔링에 흥미가 끌려 참여했는데 갈수록 ‘대표작 없는 조연배우’로 살아가는 스스로의 처지를 송두리째 돌아보게 됐다. 삶에 대한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02-2020-2050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