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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 조선’ 질타한 연암의 밝은 눈 좇아…

입력 | 2015-09-01 03:00:00

경기문화재단, 中 단둥∼베이징 ‘新연암로드’ 탐방




‘열하일기’ 중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의 배경이 된 중국 베이징 시 미윈 현 북동부 구베이커우 마을에 지난달 23일 비가 내리고 있다. 사진의 장소는 연암 박지원이 볕에 말리던 오미자를 무심코 집어먹었다 봉변을 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회 대표 제공

“나 같은 하사(下士·삼류 선비)는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과 똥 부스러기에 있다고 말하리라.”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일신수필(馹迅隨筆)의 한 대목이다. 그는 명나라를 우러러보는 숭명(崇明)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청나라 문물을 비하하는 이른바 ‘상사(上士·일류 선비)’를 비판하며 반어적으로 이렇게 썼다. 하찮은 물건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문화가 커다란 궁성보다 더 가치 있다는 얘기다.

경기문화재단(대표 조창희)은 연암 210주기를 맞아 지난달 17∼26일 연암의 연행로를 따라 중국 단둥-랴오양-선양-친황다오-청더-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신(新)연암로드’를 탐방했다. 신연암로드는 열하일기에 드러난 연암의 창의적 상상력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탐방에는 무용가와 시인 등 예술가와 인문학자를 비롯해 현대의 ‘삼류 선비’를 자처하는 17명이 참가했다.

19일 랴오양에서 선양으로 가는 도로에서는 지평선 끝까지 옥수수 밭이 펼쳐진 만주 벌판이 드러났다. 연암은 랴오양 백탑을 보고 “한번 크게 울 만한 곳”이라며 ‘호곡장론(好哭場論)’을 펼쳤다. 김홍백 박사(단국대 동양학연구원)는 “연암의 청 문화 찬사는 조선의 협소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며 “타자를 배타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 긴장의 균형은 현대 한국이 중국이나 미국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박설희 시인이 지난달 21일 중국 베이징 동북쪽 청더 시 거리에서 조선 사신들의 연행을 소재로 쓴 시를 낭송하고 있다. 김현지 씨 제공

연암이 몰래 사행단을 벗어나 마주친 사람과 사건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썼던 것처럼 이번 탐방에서도 예기치 못한 만남들이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달 17일 단둥 시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중국 동포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들렸다. “요즘 ‘스판 바지’를 하루에 한 250장, 한 달이면 7000장쯤 만드는데 다 남조선으로 갑니다.” 중국 동포라고 생각했던 한 50대 남성은 자신을 북한의 무역일꾼이라고 소개했다. 단둥의 중국인 소유 공장에서 자신이 북한 노동자를 관리하고 있는데 제품은 모두 한국으로 수출된다는 것. 동행한 북-중 무역 전문가 강주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단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국-북한의 교역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탐방단은 단둥을 출발한 지 5일째인 21일 연암의 목적지였던 베이징 북쪽 청더(承德·옛날 열하)에 도착해 연암을 기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용가 안은미 씨는 청더 강변에서 즉흥 공연을 했는데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기괴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공동체 예술을 하는 김월식 씨가 참가자들이 여정 중 촬영한 이미지를 청더 거리 곳곳에 빔 프로젝터로 투사하며 대화를 이끌자 현지 중국인들도 삼삼오오 호기심을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는 “연행로를 답사할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사라지고 있다”며 “연행길의 모습을 기록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은 “연행로는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길이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로였고,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건너간 길이었다”면서 “경제와 문화 교류의 통로가 되고 있는 연행로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문화재단은 동행한 미디어 아티스트 등의 작업을 바탕으로 답사 자료를 정리하고 2016년까지 연암의 발자취를 추가로 연구한 뒤 전시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청더·단둥=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