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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전문기자의 기업가 열전]김순자 한성식품 사장

입력 | 2015-09-02 03:00:00

“세계인 입맛 잡자” 30년간 김치 1000여종 개발




김순자 한성식품 사장이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자르고 있다. 한성식품 제공

김상철 전문기자

“김치는 나를 살린 음식이다.”

충남 당진에서 2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알레르기가 심해 대부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예외가 김치. 그래서 늘 김치와 밥을 먹었다. 겨우내 먹는 김장김치가 맛있으면 살이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꼬챙이처럼 마르곤 했다. 종갓집에 대가족이라 어머니는 김치를 잘 담갔지만 허약한 딸이 안쓰러워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비법을 배우는 등 더 맛있는 김치를 만들려고 애썼다. 어머니가 김치를 담글 때면 메모를 하며 열심히 비법을 익혔다.

1985년 한 호텔 음식점에 갔다가 우연히 “김치 맛이 없다는 고객 불만이 접수됐다”는 조리사의 얘기를 들었다.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 공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결혼 후 집들이를 앞두고 총각무로 처음 담근 김치를 맛본 지인들이 “정말 맛있다”고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업 구상을 가족에게 말하자 “여자가 무슨 사업이냐”, “누가 사준다고 하더냐”며 반대했다. 여자라서 더 무시하는 것 같아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이사 사장(61)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32세 때인 1986년 김치 사업에 나섰다. 폐업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109m² 규모의 단무지 절임공장을 사들인 뒤 설비를 갖췄다.

부식 공급업체가 김치 15kg을 주문했다. 가장 좋은 재료를 구해 배추김치를 담가 원가에 인건비만 붙인 가격으로 납품했다. 김치를 공급받은 대기업 쪽에서 맛있다고 했다며 부식업체는 주문량을 50kg으로 늘렸다.

손맛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유명 호텔 2곳에서 샘플을 요청했다. 몸뻬를 입고 김치를 담그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달려갔다. 3차례 샘플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주문을 얻어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당국 측이 각국 선수가 묵을 호텔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다 공장을 찾아왔다. 제조 과정을 꼼꼼하게 체크한 뒤 공식 김치 공급업체로 지정했다. 브랜드가 알려지면서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등에도 김치를 공급했다.

어느 날 “젓갈 맛이 덜 난다”는 클레임이 들어왔다. 맛을 봤으나 평소와 차이가 없었다. 지역에 따라 김치 맛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먹어도 맛있다고 할 만한 김치 개발에 나섰다. 팔도에서 쓰는 각종 재료와 방법으로 한 달 넘게 연구한 끝에 모두가 맛있다고 하는 비법 레시피를 개발했다.

그때까지는 김치 담그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김치 표준화를 위해 제조법을 매뉴얼로 만들었다. 김치 회사로는 처음으로 1996년 ISO 인증을 받았다.

외국인이 김치 냄새와 맛에 기겁하는 것을 보고 세계인이 먹을 수 있는 김치 개발에도 착수했다. 피망 양배추 브로콜리 수박 사과 등 100여 가지 채소와 과일로 색깔과 향기가 좋고 맵지도 않은 김치를 만들었다. 2년간 샘플 10t, 연인원 6만 명의 시식을 거쳐 2002년 미니롤보쌈김치와 깻잎양배추말이김치 등을 개발했다. 2003년 일본과 싱가포르국제발명전에 출품해 금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이 “원더풀”을 연발하는 것을 보고 김치 세계화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계인이 먹는 여러 채소로 김치를 만들 수 있어요.”

2005년 백년초로 백김치를 만들었다. 김치로는 처음으로 미국 특허를 받았다. 이어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백년초 백김치와 포기김치에 대한 품목 승인을 받아 수출길을 열었다. 2007년에는 미 국방부의 위생 심사를 통과해 미군에도 김치를 공급하게 됐다.

고비도 많았다. 사업 초기 관공서 김치 납품권을 따냈으나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재료비가 5배로 뛰어 큰 손해를 봤다. 2005년 ‘중국산 기생충알 김치’ 파동 때는 하루 120t이던 김치 생산량이 20t으로 급감했다. 폐업까지 고민했으나 한성식품 김치는 안전하다는 고객의 믿음 덕분에 매출이 다시 늘면서 위기를 넘겼다.

대한민국김치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 사장은 세계 15개국에 김치를 수출하고 있다. 한성식품은 연매출 500억 원대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치 분야에선 처음으로 2009년 식품명인, 2012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지금까지 개발한 김치만 1000종이 넘고 미역김치 브로콜리김치 등 24개의 특허도 갖고 있다. 세계 각국의 요리사가 찾아와 배우는 김치전문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게 그의 꿈이다.

김상철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