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판문점 도끼만행에 한미연합 보복작전… 北사과 끌어내
대한항공 858편 항공기를 폭파한 김현희(맨 왼쪽 사진 가운데)가 198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되고 있다. 위 사진은 1976년 8월 북한군들이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한미 장병들을 공격하는 장면. 왼쪽 작은 사진은 1983년 10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할 예정이던 버마(미얀마) 아웅 산 묘역 참배소가 북한군이 설치한 폭탄에 의해 파괴된 현장. 동아일보DB
198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에게 떨어진 특명이다. 그해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항공기를 폭파해 115명의 생명을 앗아간 김현희의 신병을 인도받아 한국으로 압송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소행을 강력히 부인하는 북한의 발뺌에 맞서기 위해서도 김현희의 증언이 필요했다.
우리 외교는 문자 그대로 총력전을 펼쳤다. 공범인 김승일이 자살한 상황에서 김현희를 데려오지 못했다면 한국 외교는 처참한 실패라는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우리 외교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 바레인 공항에서 일본 위조여권에 덜미
1987년 11월 28일 오후 11시 27분경 승객 115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 여객기가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했다. 중간 기착지인 아랍에미리트(UAE)의 수도 아부다비를 경유해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 가족으로 위장한 북한공작원 김승일(당시 70세)과 김현희(당시 26세)는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지령을 받고 출발 당일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한항공 858기에 탑승해 라디오와 술로 위장한 고성능 폭탄을 좌석 선반 위에 둔 채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비행기는 29일 오후 2시 5분경 버마(지금의 미얀마) 근해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안기부 요원 10여 명이 바레인에 급파됐다. 어디 가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요원이 많았을 만큼 상황이 긴박했다고 한다. 바레인 정보당국은 위조여권을 소유했음에도 김현희가 일본인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김현희를 서울로 데려올 방법은 없었다.
○ “비행기서 시신 들어올려 금속 탐지”
안기부 요원들은 밤낮으로 바레인 정보당국을 설득했다. 우리 정부가 과거 북한의 남파 간첩에게서 압수한 자살용 독극물 캡슐을 제시하며 김현희가 사용한 것과 동일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서울의 안기부 본부와 외무부는 미국, 일본과 긴밀한 외교 공조를 펼쳤다. 그 결과 김현희 김승일의 여권에 적힌 주소에 이들이 살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증거가 하나둘 늘어나자 요지부동이던 바레인 정보당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레인 모처에 숙소를 마련했지만 밤낮으로 공항에서 타고 온 전세기 지키기 작전을 벌였다. 공항에 있는 이 비행기에 북한 테러요원이 잠입해 폭탄을 설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보관돼 있던 김승일의 시신도 문제였다. 시신을 인도받기 전에 그 안에 폭탄을 설치할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요원들은 비행기 안에서 시신을 바닥에 두고 금속탐지기로 검사를 했지만 주변의 금속 성분 때문에 시신에서 계속 금속 탐지 신호가 왔다. 요원들이 시신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이상이 없다는 것을 최종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국내로 들어온 김현희는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1990년 4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안기부 촉탁직원이 됐다. 폭발한 대한항공 858편 기체는 사건 발생 약 2년 후 일부가 인양돼 한국 정부에 인도됐다.
○ “음산한 묘역…느낌은 불안했다”
앞선 1983년 10월 9일 버마에서는 또 다른 북한의 테러가 자행됐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포함한 내각 요인을 대거 대동한 우리 대표단을 노린 폭탄테러로 17명이 사망한 참사였다.
전 대통령은 10월 8일 공식 수행원 22명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 공식 순방길에 올랐다. 9일 전 대통령은 버마의 독립운동 영웅 아웅 산의 묘소 참배가 예정돼 있었다. 서석준 부총리는 경호원들과 함께 행사 준비 및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이 예정시간(오전 10시)보다 30분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서 부총리는 애국가 예행연습을 한 번 더 했다.
북한 공작원 신기철은 현장에서 대기하면서 전 대통령이 30분 늦게 도착한다는 첩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음악이 나오자 신기철은 전 대통령이 도착한 줄 알고 오전 10시 28분 폭탄을 작동시켰다. 이 테러로 서 부총리를 포함해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17명이 순직했다. 교통 정체로 11시에 도착해 화를 면한 전 대통령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다음 날 급거 귀국했다. 버마 정부는 이 사건이 북한 공작원 김진수 강민철 신기철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장차관급 수행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기백 전 국방부 장관(85)은 당시 상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전 장관은 “버마에 도착할 때부터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며 “아웅산 묘역에 들어섰을 때도 뭔가 불안하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이 전 장관은 30여 개의 클레이모어폭탄(구슬폭탄) 파편이 머리 등 온몸에 박혔다. 참배 장소에 설치돼 있던 구조물에 하체가 깔려 왼쪽 다리 살점이 떨어져나가 뼈가 보이는 중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부관인 전인범 중위(현 1군사령부 부사령관·중장)가 2차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지 않았으면 목숨을 건질 수 없었다.
버마는 당시 한국보다 북한과 가까운 나라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버마는 북한과 국교를 단절했다.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3개국도 북한과 국교를 끊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당국자는 “당시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과의 공조로 규탄 성명이 이어지면서 버마의 국교 단절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북한 “우리가 심은 나무다. 베지 마라”
북한군의 테러에 주한미군이 살해된 사건도 있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도끼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있던 15m 높이의 25년생 미루나무 가지를 한미 양국 군 장병들이 잘라 내는 작업을 하다가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릿 중위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나무가 시야를 가려 북한군 동향을 파악할 수 없었던 한미 양국은 이전에도 나뭇가지를 자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군 카투사(KATUSA) 중대장이었던 김문환 씨(68)는 “18일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6일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기 위해 갔다. 당시엔 북한군들이 막아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18일 한국군 5명과 주한미군 6명이 작업에 나섰다. 북한군은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당시 JSA 경비중대장이었던 보니파스 대위는 미루나무가 우리 측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아군이 나뭇가지를 치는 데 쓰던 도끼를 빼앗아 가장 먼저 보니파스 대위를 가격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김 씨는 그를 품에 안고 앰뷸런스를 탔고 이동 중 김 씨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부상을 당했던 김 씨는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전우가 죽었는데 이 정도 상처는 치료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 함께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시대비태세인 데프콘을 3단계로 한 단계 격상했다. 북한도 준전시상태 선포로 맞섰다. 미국은 F-111 전투기와, B-52 핵폭격기,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등을 한국에 급파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한미 양국은 미루나무를 제거하고 북한군 초소 2곳에 피해를 입히는 보복작전인 ‘폴 버니언 작전’(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이름)을 실행했다. 보복작전 이후 북한은 김일성 주석 명의의 ‘유감성명’을 발표했다.
김 씨는 “북한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한미동맹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라며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한 연합군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