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문화예술인상 수상 가수 이승철
《 우리는 평일(4일) 대낮에 생맥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올해로 데뷔 30년을 맞는 가수 이승철(49)과는 초면이었지만 어색함이 없었다.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농담과 웃음으로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전날 과음했다”는 그에게 “누구랑 마셨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광복절 70주년 대합창 ‘나는 대한민국’ 작가들하고 마셨다”고 했다. 》
4일 본격적인 인터뷰가 이뤄지기 전날인 3일 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 시상식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만난 가수 이승철. 진지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그는 “큰 상을 받게 되어 책임감이 더 생긴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허문명 국제부장
―TV로 그 공연을 봤는데 왼쪽 소매에 붙어 있던 태극기가 인상적이었다. 딸과 함께 광복절에 국기 게양하는 사진도 트위터에 올렸던데 연출인가.
“명색이 ‘국민 가수’ 소리를 듣다 보니 책임감이 많이 생겼다. 횡단보도 건널 때에도 독도 지킨다는 사람이 신호도 안 지키면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며 건넌다.”
“어느 날 그런 차에서 내리는 게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지적한 것도 아닌데, 물론 내가 지적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지만(웃음). 남들에게 보이는 것들은 부질없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들이란?
“좋은 차, 좋은 집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연예인은 과시욕도 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청소년들에게 헛된 꿈을 꾸게 하는 건 아닌가.
“(다소 발끈하며) 연예인이 왜 헛된 꿈인가. 그렇게 보면 나야말로 헛된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다. 딴따라 상대 안 한다고 집안 모임도 못 나갔다. 연예계는 이미 거대 산업으로 컸다. 본인이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줘야 한다.”
―당신 같은 성공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당사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왜 헛된 꿈이라며 막느냐 이 말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핑계로 가수를 꿈꾸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소질 있는 아이들은 적극 밀어줘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더군다나 월드 마켓이 열린 상황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부모 시각이다. 자녀의 삶을 왜 부모가 걱정하나. 그리고 대학, 대학 하는데 명문대로 알려진 경희대에도 실용음악과가 생겼다. 노래만 잘해도 교수 되는 세상이다.”
―대학교 어디 나왔나.
“수원대.”
―무슨 과?
“기계과. 안 맞아서 다니다 말았다.”
―스타로 성공한다 해도 은퇴가 너무 빠르지 않나.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빅뱅, 소녀시대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다. 나를 봐라. 30년 하고 있지 않나.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무대에 서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유명해지는 삶은 좀 피곤하다고들 하던데….
“유명해지고 싶어 연예인 된 거 아닌가. 그 불편함을 즐겨야 한다. 연예인들 중에 외출할 때 모자, 선글라스로 얼굴 가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난 지금도 지하철도 타고 명동 한복판을 자유롭게 다닌다. 사람들이 알아보면 악수하고 사인해 주고. 기질상 그게 힘들면 훈련이라도 해서 바꿔야 한다.”
―댓글도 보나.
“안 본다.”
―악플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후배들도 상처 많이 받는다. 그럴 땐 ‘좋은 사람들과 나눌 시간도 부족한데 왜 쓸데없는 사람들을 신경 쓰느냐’고 얘기해 준다.”
연예인은 유명세 불편함 즐겨야
―원래 ‘강철 멘털’?
“그 반대다. 멘털이 약해서 피하는 거다. 상처받으면 계속 머릿속에서 되감는 스타일이다. 사람들은 내가 B형일 거라고 생각하던데, A형이다.”
―소심한?
“배려형이지. 하하하.”
―과거에 여러 스캔들 겪으며 당할 만큼 당해서인가.
“스캔들은 없었고 사건이 많았지(웃음). 스캔들은 남녀 관계에 대한 루머 같은 거고…. 사건은 내가 저지른 일이고.”
―어떻든 그 과정에서 욕 많이 먹으면서 내공이 쌓였나.
“남의 눈 신경 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근데 연예인의 피(血·혈)라는 게 수족관 붕어가 되는 느낌을 즐기는 거 같다. 그걸 싫어하면 못 한다.”
―우울증 걸린 적 있나.
“없다. 혹시 인기가 사라지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바라볼까 걱정하고 싶지 않다. 늘 무대에서만 ‘이승철’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냥 ‘이승철’이다. 너무 솔직하게 행동하는 탓에 사건 사고에 더 많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그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경험의 산물인가.
“내가 데뷔했던 당시엔 서른 넘긴 가수가 거의 없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가 히트 친 때가 스물여덟 때였는데 인기가 사라지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더라도 신경 쓰지 말자는 다짐을 무한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을 끌어온 힘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팬의 힘’이다. 1990년도 대마초 사건 이후 5년간 방송정지를 먹고 전국 공연을 했는데 그때 팬들이 지금까지 힘이 되어왔다. 대중은 그런 거다. 나더러 대중가수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한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이 나 먹여 살려줄 거냐고. 하하하.”
―전화를 매니저 통하지 않고 직접 받던데….
“매니저가 없다. 30년째 내가 직접 인터뷰 약속 잡는다. 연예인들 90%는 ‘기자 알레르기’가 있다. 후배들한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대중에 노출되는 게 우리 직업 아닌가.”
‘30년 가수의 길’ 이끈건 팬의 힘
―노래하기도 바쁜데 에너지 소모가 크지 않나.
“아무리 늦게 자도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난다. 커피 마시고 아이 학교 보내고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30년 동안 그렇게 살아서 별로 힘들지 않다.
―예술가들 중에는 대중과 유리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겉으론 그렇게 말해도 속으론 안 그럴 거다. 살아서 유명해지고 싶지 죽고 나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견을 달고 싶지만 넘어가자(웃음). 대중가수로 성공하려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만 하겠다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철저히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거다. ‘히트곡’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대중이 만들어주는 거다. 결혼한 뒤부터는 좋은 참모들 써서 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작전으로 가고 있다.”
―지난 인터뷰 기사들을 보니 ‘가수로서의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데….
“가수로 타고난 것도 운명이지만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곡과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일종의 ‘아다리’(‘적중’을 뜻하는 비속어) 같은 게 잘 맞아야 한다.”
그가 생맥주에 이어 나온 청주 한 잔을 들이켜더니 말을 이었다.
“1994년 뉴욕에 가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들을 섭외해 앨범을 만들었다. 스팅, 마돈나 앨범에 참여한 거장들이었다. 무조건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망했다(웃음).”
―패인(敗因)은 뭐였다고 보나.
“너무 어려웠다. 뉴욕에선 괜찮았는데 서울 와서 들어보니 너무 지루했다. 거듭 말하지만 음악적 실력과 감이 운과 어우러져야 히트할 수 있다. 가장 큰 운은 사회적 분위기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완전 망한 노래였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동영상에 배경 음악으로 깔리면서 히트를 쳤다. ‘네버엔딩 스토리’도 3개월 동안 죽 쑤다가 막판에 유재석 송은희가 녹음실에 찾아오면서 소위 말해 ‘떴다’.”
―은퇴도 생각하나.
“은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나를 더이상 찾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거다.”
―노래 안 하면 뭐할 건가.
“데뷔 30년이라고 자꾸 소감이 어떠냐고들 물어서 가만히 생각해봤다. 굳이 구분하자면 ‘네버엔딩 스토리’가 히트치기 전이 제1의 시기, 그 이후부터 결혼 전까지가 제2의 시기, 결혼 후 지금까지가 제3의 시기이다. 제4의 인생을 계획 중이다. 제주도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파리에 살면서 요리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영적 체험후 봉사의 삶 시작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고 있다.
“결혼 후 나만의 영적 체험을 했다. 사실 내가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종교적 체험이 크다. 첫 봉사가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를 짓는 것이었는데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시작한 일이다. 학교 10개 짓는 게 목표인데 지금 4개 지었다. 차드에서 알게 된 소녀가 있는데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력을 잃고 있었다. 우리 집에 데려와 3개월 넘게 있으면서 수술을 시켜주었다. 그 아이를 공항에서 보내고 들어오는 길에 김천교도소 청소년들을 위해 노래를 가르쳐 달라는 ‘사역’이 들어왔다. 이후 바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 노병을 돕는 사역이 들어왔다. 그런 일들이 연달아 이어져 나도 신기했다.”
그에게 3일 한국방송협회가 주는 한국방송대상(문화예술인상)을 안긴 탈북 청년들과의 독도 합창 다큐멘터리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일이라고 했다.
“어느 날 교회 집사님이 집사람을 통해 탈북청소년합창단 ‘위드 유’가 독도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 하는데 지휘를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처음엔 너무 정치적인 행위로 느껴졌고 무엇보다 독도는 (김)장훈이 형 것 아닌가(웃음). 그러다 집사람이 독도뿐 아니라 유엔과 하버드대에서도 합창을 해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자고 집요하게 설득해서 하게 됐다.”
한 가지 일에 30년을 몰두해 성공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에겐 특별한 비결이 있기 마련이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던 것도 부침이 심한 가요계에서 30년을 롱런한 비결이었다. 가요계라고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성실, 집념,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목함지뢰 희생 장병들에게 성금을 전하러 간다며 국군수도병원으로 향했다. 성공한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이 되려는 또 한 사람의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을 만난 것 같았다. ‘노는 오빠 이승철’을 좋아했던 20대의 젊었던 팬들이 ‘철든 오빠 이승철’과 함께 나이 들어가듯 말이다.
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정리=이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