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순덕 칼럼]北 김정은, 꽃놀이패 잡았다

입력 | 2015-09-07 03:00:00

지뢰 도발로 시작된 남북대화… 잘하면 금강산관광 재개로
中시진핑은 9·19공동성명 역설… 北美관계 정상화도 챙길 판
통일 위해 주변국 협조 필요해도, 중국과 협력하는 평화통일로
주한미군 없는 중립국 될 것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어쩌면 북한 김정은의 고난도 술수였는지 모른다. 이미 신년사에서 그는 “승리의 포성을 높이 울려 당 창건 70돌을 혁명적 대경사로 빛내겠다”며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 깜짝쇼를 예고했다. 미국 또는 남한과 대화를 시도해 보고, 안 되면 4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목함지뢰 도발로 남북 대화의 장이 열렸다.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을 겨냥한 듯 “긴장을 초래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반대한다”고 전승절 열병식을 빛내기 위해 방중(訪中)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말했다. 과연 그날 김정은은 그 어떤 행위도 안 하고 있을 것인가.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이렇다. 8·25 남북 합의 전의 김정은은 큰집 행사까지 망칠 순 없어 가만있었지만 이젠 다르다. 뭐든 쏘기만 하면 시진핑의 위신은 박살이 난다. 남한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가 필요하다”며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 체제 강화에 나설 게 뻔하다.

그렇다면 중국이 가만있을 수 없다. 지금까진 ‘비핵화’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김정은을 멀리했으나 6자회담이 열릴 때까지 참아 달라며 북-중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 북이 핵 실험을 하면 또 발칵 뒤집히겠지만 미사일 정도는 쏴도 중국은 식량과 에너지 공급 중단 같은 강한 압박을 못 할 것이다. 중국의 한반도 전략 첫째가 평화와 안정, 즉 현상 유지다. 북이 붕괴해 자유민주 체제로 통일되고, 주한미군이 중국의 턱밑까지 올라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원치 않는 미래인 거다.

한국도 안심할 처지가 못 된다. 설령 북이 미사일을 쏜대도 정부는 8·25 남북 합의를 어긴 ‘비정상 사태’라며 대북(對北) 확성기를 틀지 못할 것이다. 시진핑이 경고한 ‘긴장을 초래하는 그 어떤 행위’엔 남한 확성기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로선 당장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이 잘 굴러가서 추석 전에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까지 나와야 귀성 민심을 붙잡을 수 있다. 10월 10일을 무사히 넘기고 16일 한미 정상회담까진 북이 조용히 있어 줘야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한중 합의대로 6자회담 해 보자”고 주장할 수 있다. 북이 이산가족 상봉을 깰 조짐을 보이면 정부는 금강산 관광이든, 5·24 대북 제재 조치 해제든 내놔야 할 판이다.

김정은 신년사를 분석한 아산정책연구원은 “북에선 우리 정부가 광복과 분단 70년을 맞아 내심 대북 정책 성과에 초조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겉으론 냉랭했던 시진핑도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을 꽤 챙겼다. 김정은이 가장 원하는 게 체제 보장과 북-미 관계 정상화인데 바로 그 내용이 담긴 9·19 공동성명 이행을 ‘시진핑이 역설했다(He urged)’는 신화통신 영문판 보도를 보면 알 수 있다(청와대 자료에선 ‘양측이 주장했다’고 전했다). 다음 달 10일 불꽃놀이를 해도 나쁠 게 없고, 안 하면 더 좋고. 김정은은 꽃놀이패를 쥔 셈이다.

김정은과 시진핑에겐 고맙기 짝이 없게도 박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중국과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혀주었다. 남북통일에 주변국의 협조와 동의가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왜 하필 중국과 먼저 협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국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통일한국’이라는 걸 대통령도 안다면 더 기이하다. 중국의 협력으로 통일하려면 한미동맹을 종식시키거나 아니면 한반도 미군 철수, 적어도 중국에 우호적인 비핵 비동맹 중립국은 돼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이런 통일을 다수 국민이, 대통령이 원한다곤 생각지 않는다.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서도 통일 이후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중국을 꼽은 국민이 절반이고 미국은 9.1%에 불과했다. 심지어 진보 성향 응답자가 중국의 위협을 가장 크게 우려했을 정도다.

박 대통령이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에서 박수를 쳤다 해도 중국은 국익과 영향력 확보를 위해 한국을 관리하고, 미워도 북한을 봐줄 뿐이다. 미국은 2013년 한미동맹 60주년 기념성명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 지지를 천명했지만 시진핑도 동의한다는 증거는 없다. 아무리 북핵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 해도 대체 대통령이 왜 이렇게 통일을 서두르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