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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홍성담 ‘김기종의 칼질’ 그림속 내용

입력 | 2015-09-08 17:46:00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이는 2015년 3월 모일 모시에 민화협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주한미국대사 리퍼트에게 칼질을 했다. 얼굴과 팔에 칼질을 당한 리퍼트는 붉은 피를 질질 흘리며 병원으로 실려가고 김기종은 <한미연합 전쟁훈련을 중단하라>고 고래고래 외치면서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는 일년 전에도 주일대사에게 시멘트조각 두 개를 던졌다. 그가 던졌던 시멘트 쪼가리 두 개는 독도를 의미한다고 했다. 독도문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이다.

독도문제든, 위안부문제든, 남북문제든……요것들의 문제를 한 발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민족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 속에는 태평양전쟁 종전의 결과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들에 있다. 당시 전쟁의 승자인 미국이 자신들의 동아시아 군사적 전략을 위해서 일본의 전쟁범죄를 대강 덮어놓은 것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친일파의 문제도 결국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이미 절망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 절망감에 대해서 나는 입을 다물었고 김기종은 비록 과도이긴 하지만 칼로써 표현한 것이다.

김기종은 지금 종북으로 몰리는 대신에, 리퍼트가 입원중인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는 한국국민들에 의해서 그의 만수무강을 비는 제단이 만들어 졌고 발레와 노래와 부채춤으로 그가 쾌유하기를 기원하는 향연이 벌어졌다. 또한 리퍼트 대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큰절하기 이벤트가 줄을 이었다. 누군가는 So Sorry를 외치며 무기한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 어떤 시민은 그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 미역국과 개고기를 선물로 바쳤다. 조선침략의 괴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죽인 안중근 의사도 역시 우리민족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토는 저격범 안중근에 관한 부하의 보고를 받고 숨을 거두기 직전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철없는 놈!” 당시에 안중근을 독립투사로 불렀던 사람이 우리 민족 중에서 몇이나 되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조선에게 형님의 나라인 일본의 훌륭한 정치인을 죽인 깡패도적쯤으로 폄하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안중근의 저격사건이 조선을 더욱 고립시키고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을 가속화 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천황 히로히토, 쇼와 부자를 폭탄으로 저격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이봉창의사도 대부분의 한민족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을 것이다. 당시 한민족 대부분은 이봉창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무사한 천황 히로히토를 위해서 광화문에 모여 땅바닥에 엎드려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행사를 수일간 열었다고 했다.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군 장교들을 폭사시켰던 윤봉길의사도 당시 한민족 대부분은 그를 불령선인으로 몰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을 것이다. 가령 이런 욕을 했을 것이다. “저런 놈들 때문에 조선인이 엽전이라고 욕 얻어먹는다. 우리 조선을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장교들을 죽이다니… 철딱서니 없는 나쁜 새끼!” 독립투사 수원거부 이회영은 모든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1931년에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항구에서 한인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당대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흉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맥락을 살펴보면 당시 한민족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36년 동안 자기네들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천황을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라며 이 땅의 젊은이들을 독려했던 이광수, 황국신민으로써 천황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정신대 모집을 강요했던 모윤숙 등등의 목소리는 당시에 많은 한민족에게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직후에 많은 한민족들이 조선총독부 앞에 몰려가서 머리를 풀고 땅에 엎드려서 일본의 패전에 대해서 서럽게 울었던 반면에 일본의 패전과 한반도의 해방을 기뻐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눈에 띠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일 오후에 겨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서 어찌할 줄 모르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일본순사와 한국순사들이 와서 해산을 명령하자 단 한마디의 군소리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미국에게 전시작전권을 바치고 서울 한복판에 외국군대의 병영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민족 대다수에겐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아니었듯이 지금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가 결단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암튼, 김기종이가 간질을 앓았던, 수전증이 있던, 과대망상증이던… 나이 56세에 병 없는 사람이 있을까만… 그는 칼질로써 자신의 절망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넌지시 욕을 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창고 깊숙이 숨겨놓은 여러 종류의 칼 여덟 자루를 꺼내고, 실물을 꼭 닮은 MAGNUM357 모의권총도 찾았다. 칼날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보니 여전히 날카롭게 빛난다. 제법 묵직한 매그넘 모의권총을 손에 쥐고 길게 뻗어 어딘가를 겨누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매그넘의 가늠쇠 위에 올려본다. 나는 이것들을 다시 꼭꼭 싸서 더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나서 혼잣말을 했다.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정말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까?

내가 겁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김기종이가 리퍼트 대사에게 칼질하다

2015. 3. 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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