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선동열의 수식어는 ‘국보 투수’였다. 프로야구 3년 연속(1989∼1991년) 3관왕을 달성한 투수는 그가 유일하다. 이제는 멸종된 0점대 평균자책을 3차례나 기록했다. 그의 전성기 때 대학가에서는 ‘선동열 방어율(평균자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학점 나쁜 학생들이 자조적으로 쓰던 말이었다.
허재는 ‘농구 대통령’으로 불렸다. 실업 선수 시절 기아자동차의 농구대잔치 7회 우승을 이끌었다. 프로농구 1997∼1998시즌 준우승팀 선수로는 유일하게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가 됐다. 허재가 손가락 탈골에 눈두덩이 찢어져 피를 흘리면서도 코트를 누볐던 기아와 현대의 챔피언결정전은 지금도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된다.
선수로서 독보적이었던 이들은 사령탑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선동열은 2005년 삼성에 부임하자마자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허재는 2005∼2006시즌 KCC를 맡아 초반에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2009년, 2011년에 우승 감독이 됐다. 홍명보는 2012년 런던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이뤄냈다. ‘스타플레이어는 지도자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조차 ‘스타 중의 스타’였던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야인(野人)이 됐다. 홍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지고 지난해 7월 하차했다. 대한축구협회의 재신임을 받았지만 여론은 등을 돌렸다. 선 전 KIA 감독도 재계약을 했지만 팬들의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10월 자진 사퇴했다. 허 전 KCC 감독은 올 2월 시즌 도중 성적부진을 이유로 자진 하차했다. 팬들은 냉정하다. 응원하는 팀이 부진하면 그 화살을 감독에게 돌린다. 성난 팬들에게 ‘국보 투수’ ‘농구 대통령’ ‘영원한 리베로’는 과거일 뿐이다.
최근 선 전 감독이 ‘2015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되며 현장에 복귀했다. 허 전 감독과 홍 전 감독은 아직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이 이대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한국 스포츠 레전드 3총사를 다시 감독으로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이름값’ 대신 ‘실력’으로 재무장해 돌아온다면 머지않은 일일 것이다. 팬들이 등을 돌린 이유를 진심으로 깨달았다면 크게 반길 일이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