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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공산당 탄압에 스러져간 지식인의 삶

입력 | 2015-09-12 03:00:00

◇나의 중국 현대사/장이허 지음·박주은 옮김/524쪽·2만5000원·글항아리
“우파를 처단하라” 마오쩌둥이 꺼내든 숙청의 칼날




갓난아기 때의 저자와 아버지 장보쥔 교통부 장관(맨 위쪽 사진의 뒷줄 왼쪽). 오랜 정치적 동료로 장보쥔 숙청에 앞장선 스량 중국민주동맹 부주석(중앙 사진의 오른쪽·작은 사진은 젊은 시절)이 중국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1957년 반우파 투쟁 당시 함께 축출된 뤄룽지 삼림공업부 장관(아래 왼쪽 사진)과 추안핑 광밍일보 편집장(〃오른쪽 사진)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최근 한반도 전문가라는 중국의 한 명문대 교수와 인터뷰하면서 몹시 실망한 적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과 관련해 중국 학계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그는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할 법한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중국 사정에 밝은 국내 교수는 “전승절 행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관심이 높은 데다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외신을 포함한 모든 기사를 검열하고 있어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중국 최고 학부인 베이징대에서 샤예량(夏業良) 교수와 자오궈뱌오(焦國標) 교수는 체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2013년과 2005년 각각 해임됐다.

중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 체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는 중앙선전부가 모든 신간에 대한 검열과 판매금지 권한을 쥐고 있다. 실제로 이 책도 검열로 일부 내용이 삭제된 대륙판과 그렇지 않은 홍콩판이 따로 발간됐다. 국내에 소개된 책은 홍콩판을 번역한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중국 현대사를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낸 장이허. 그의 아버지도 우파의 수괴로 몰려 숙청당했다. 글항아리 제공

이 책은 1957년 마오쩌둥의 ‘반우파 투쟁(중국 공산당을 비판한 인사들을 우파로 지목해 탄압한 정치 공작)’ 당시 희생된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희생자 중에는 저자의 아버지이자 우파 수괴로 지목된 장보쥔(章伯鈞·1895∼1969) 교통부 장관이 포함돼 있다.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에서 허수아비 야당에 불과한 중국민주동맹 부주석과 광밍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책에 언급된 나머지 인사는 저자가 어린 시절 자주 보았던 부친의 정당 동료들이다. 보통의 전기 작가는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내면묘사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의 아픔이 각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건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때문일 것이다. 반우파 투쟁 당시 장보쥔도 수십 년 동안 고락을 같이하면서 흉금을 털어놓았던 동지 스량(史良·1900∼1985)의 비판연설로 한순간에 정계에서 축출된다. 장보쥔의 정적이었던 뤄룽지(羅隆基·1896∼1965) 삼림공업부 장관 역시 평생지기에게 52가지에 걸친 비판을 받고 우파로 지목돼 숙청된다.

이들의 고난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우파라는 꼬리표가 평생 쫓아다녀 취업조차 하지 못했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홍군의 폭력 대상이 됐다. 장보쥔 밑에서 광밍일보 편집장으로 일했던 언론인 추안핑(儲安平)은 반우파 투쟁 이후 양을 치면서 살았다. 심지어 그는 생존을 위해 약간의 월급을 받는 대가로 이전 직장의 사회주의 학습에 정기적으로 불려나가 대중비판을 당하고 자아비판을 요구받아야 했다. 이쯤 되면 거의 ‘인격 살인’ 수준이다.

장보쥔 등 이른바 ‘우파’들이 평생 처절한 고통을 당한 것은 오직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1957년 6월 1일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에서 추안핑이 “당천하(黨天下·공산당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의 사상이 모든 종파주의 현상의 근원이자 당과 당 밖 사이에 모순의 출발점”이라고 발언한 게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환갑을 훌쩍 넘긴 저자는 스량 등 부친을 배신한 과거 동지들을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는다.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산당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스량의 노쇠한 모습에서 역사의 질곡과 권력의 허무함을 볼 뿐이다. 저자는 스량과 마지막 만남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썼다.

“바람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기억뿐, 그래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기억뿐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