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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에게 일본은 소중하다? 전문가 의견 들어보니…

입력 | 2015-09-14 16:33:00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초빙교수 이주흠 (전 외교안보연구원장)

긴 역사에서 일본은 우리에게 자주 禍로 닥쳤다. 고려시대 이후 끊이지 않은 왜구의 침탈, 무고한 백성들의 목까지 벼 베듯 자른 만행의 임진왜란, 20세기 초의 무자비한 국권찬탈, 그리고 위안부의 희생이 상징하는 식민지 시대의 인도에 반하는 범죄가 그랬다. 일본이 우리에게 화만이 아닌 福도 되기에 이른 것은 1965년의 국교정상화 이후다. 두 나라의 가까운 거리와 비슷한 언어가 한국이 복을 얻는데 기여했다. 법과 제도, 산업과 기술, 학문과 예술에서 일본인 특유의 프로근성과 장인정신으로 쌓은 노하우를 - 때로는 곁불 쬐듯이 - 어렵지 않게 얻었다. 서양의 각국이 이루고 만든 것도 일본이 각고의 노력으로 소화를 돕게 정리하면 바로 들여와 썼다. 필자는 일어와 일본을 알게 되며 비로소 일본이 흘린 땀의 결실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현실에 눈떴다. 한국인들이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해도 인정하기를 거리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이타심으로 베풀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리와 역사가 낳은 우연과 인연의 산물이었지만 한국이 취한 유무형의 이익이 컸다.

현역시절 몇 차례 중국을 찾은 기회에 공직자와 민간인을 만나 국민기질을 가늠하고 가장 큰 서점에 진열된 서적을 살펴 관심사를 추측했다. 그리고 멀리 혁명의 요람 옌안으로 날아가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던 사람들의 열정과 희생의 현장을 둘러보고 국가의 근본을 음미했다. 그래서 도달한 - 매우 섣불렀을 - 판단에 책과 잡지를 통해 주어들은 간접경험을 더해 일본과 비교했다. 양쪽 사람들 모두 쉽게 감정에 흐르지 않고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가운데 한쪽은 스케일, 다른 쪽은 내용물이 중요하고, 한쪽은 말과 행동에 호기와 위세를, 다른 쪽은 겸손과 가식을 실으며, 자기의사를 받아들이게 하는 압박의 방향으로 한쪽은 정면, 다른 쪽은 측면을 선호한다. 그런 다음의 결론은 내다볼 수 있는 장래까지 일본에서 얻는 것을 중국에서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다른 판단도 있었다. 오랜 제국경영의 역사가 남긴 유산으로 포용력을 물려받은 중국인들이 지도적인 국가를 위한 역할에 좀 더 어울린다는 것이었다(그 후 동중국해, 남중국해에서 벌인 완력시위, 일방주의적인 행동을 지켜보며 다소 회의를 갖게 되었지만). 일본통 외교관이라는 입장에서 자기부정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일본의 단점(단점보다 훨씬 많은 장점은 뒤에서 소개한다)은 협량狹量이다. 5~6년 간격으로 세 차례 주일대사관에 근무한 개인경험이 그 판단을 뒷받침한다. 모두 한 번씩 원했던 아파트 임차를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한국인을 “남의 집 함부로 쓰는 사람들”로 단정하는 편견이었다. 드러내 말하지는 않지만 국가, 민족 간 문화와 전통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의 다름이 아닌 우열의 문제로 여기는 경향도 그 연장이다. 위안부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일본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서 할 말이 있겠지만 가해의 역사를 갖는 입장에서 피해자의 손상된 자존심, 희생자의 한을 헤아려 눈 질끈 감는 과감한 결단으로 매듭짓지 못하는 편협이 일본의 한계다. 세계각지에 넘치는 난민을 받아들이고 참정권제한 같은 재일동포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개방과 포용의 가치대국(liberal power)을 지향하지 못하는 좁은 도량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기대를 얹어 시선을 중국으로 돌려보지만 허탈했던 천안문 성루의 풍경이 마음에 걸린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수단, (필자가 대사로 일했던) 미얀마… 보편적 가치의 구현이 아시아의 선두인 한국의 지도자가 자유세계가 경원하는 - 자유, 자율, 인권과 인연이 먼 - 群鷄정상 속의 一鶴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장래를 위해 불가피한 고육지책, 지정학이 강요한 숙명적인 선택인 줄 알아 더욱 안타깝다. 그렇게 현재의 중국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하고, 또 앞으로 언젠가는 옛날처럼 다시 중국인들에게서 이것저것 배우고 얻을 때가 온다. 그러나 1949년 건국하여 1978년 개혁개방에 나설 때까지의 ‘잃어버린 30년’을 메우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일본의 존재는 앞으로도 오래 동안 소중할 수밖에 없다. 시민정신, 호양정신, 직업정신, 법치, 공직사회의 청렴성, 가진 자들의 겸손,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집착이 낳는 언행의 품위… 우리가 벤치마킹할 무형의 자산이 많다. 실사구시의 대상도 못지않다. 한국과 중국은 전무한 노벨과학수상자를 16명이나 배출한 저력, 국제공업판도를 좌우하는 대기업 군과 첨단기술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중견기업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쥐를 잡아야하는데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떤가? 내키지 않아도 잘 지내면서 이익을 취해야한다. 아직은 우리가 부족해서다. 무엇보다 일본과도 사이좋은 한국이라야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의구심을 덜고 중국도 한층 더 공 들이지 않겠는가?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초빙교수 이주흠 (전 외교안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