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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인 여성 보호장치 미흡” 7:6으로 유책주의 유지

입력 | 2015-09-16 03:00:00

[대법 “바람피운 배우자 이혼청구 불가”]
“간통죄 폐지돼 축출이혼 늘 우려… 재산분할-위자료로 생계보장 못해”
양승태 원장이 캐스팅보트 행사
법조계 “7대6 결정 함의 커”… 일선 법원 판결혼선 정리될듯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5일 혼인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에게 이혼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기존 판례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허용하는 예외를 확대했다. 대법관 의견도 7 대 6으로 팽팽히 맞서 혼인 파탄 책임 소재와 무관하게 이혼 청구를 허용하는 판례 변경이 머지않았음을 시사했다.

○ “아직은 시기상조”

외도를 한 배우자가 먼저 이혼소송을 낼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대법관 12명의 의견은 6 대 6 동수였다. 여성 대법관인 박보영 대법관과 김소영 대법관의 판단도 엇갈렸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기존 유책주의 유지 쪽으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한 표 차로 명암이 엇갈렸다. 양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6명 중 1명만 파탄주의를 지지했다면 50년 동안 유지돼 온 이혼제도의 근간이 바뀌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례를 변경하려면 이혼에 관련된 전체적인 법체계와 사회 경제적 상황에 의미 있는 변화가 생겼는지 등에 관한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며 “우리 법제상으로는 재판상 이혼까지 파탄주의를 도입할 필연적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기존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과 달리 한국은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도 당사자 간 ‘협의 이혼’이 가능하다. 지난해 전체 이혼 중 77.7%가 협의이혼을 통해 이뤄진 만큼 현행법으로도 유책 배우자가 적정한 보상을 약속하며 상대를 설득하면 충분히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의 경우 상대 배우자나 자녀 등에 대한 보호 장치가 마련돼 있지만 아직 한국은 이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간통죄 폐지로 불륜을 형사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급히 파탄주의를 도입했다간 사실혼에 가까운 불륜관계가 만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담겨 있다.

특히 유책 배우자는 이혼하면 미성년 자녀에게 양육비를 주도록 돼 있지만 상대 배우자를 부양할 책임은 없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여전히 취업 임금 양육 등에서 사회 경제적 약자인 현실에서 보호조항 법제화 없이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만으로는 축출 이혼당하는 배우자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 파탄주의 허용 예외 확대

대법원은 기존 판례를 유지했지만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는 예외를 확대했다. 그동안은 유책 배우자의 상대 배우자가 이혼할 생각이 있으면서도 오기로 거부하던 사례에 한해 이혼청구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책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충분한 보호와 배려를 했거나, 혼인관계가 파탄 난 지 오래돼 상대 배우자의 정신적 고통이 상쇄됐다면 유책 배우자라도 이혼소송을 낼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사실상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청구를 허용하는 파탄주의 도입이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소수 의견을 낸 김용덕 대법관(주심) 등 대법관 6명도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지고 재산분할과 위자료, 양육비 제도 등 법적 보호 장치가 충분하므로 국가가 억지로 혼인관계를 강제해선 안 된다며 파탄주의 도입을 촉구했다. 일선 법원에서는 ‘축첩하는 남편-희생하는 아내’라는 대립구도가 구시대적 유물이 됐다는 지적과 더불어 시대적 흐름에 맞춰 부부 관계가 사실상 끝났다면 법적 이혼을 폭넓게 허용해줘야 한다는 판결을 종종 내리고 있다.

○ “5년 내 파탄주의 도입 가능”

이번 판결로 일선 법원에서 대법원 판례와 달리 파탄주의에 입각한 판결이 종종 내려져 빚어졌던 혼란이 일단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7 대 6’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판례 변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숫자가 주는 함의가 있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세종의 가사전문 이홍철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지극히 한시적인 판단으로, 빠르면 5년 안에도 판례 변경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사전문법관을 지낸 법무법인 지우의 이현곤 변호사는 “대법원의 판결이 그동안의 논란을 종식시킨 결정이라기보다는 논의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여성 판사는 “결국 복지로 풀어가야 할 문제”라며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비자발적 경력단절을 겪고,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어 사회적 약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어야 파탄주의를 도입할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유책주의 ::

배우자가 동거·부양·정조 등 혼인의무에 위반되는 행위를 저질러 이혼 사유가 명백하면, 상대 배우자에게만 재판상 이혼청구권을 인정하는 제도.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엄격하게 제한해 가정 파탄에 책임이 없는 배우자를 보호할 수 있다.

:: 파탄주의 ::

결혼관계가 사실상 회복될 수 없을 만큼 파탄 났다면 어느 배우자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이혼을 허용하는 제도. 서로 책임을 묻기 위해 상호 비난하는 가운데 부부 사이가 더욱 악화되는 걸 방지하고 껍질뿐인 혼인관계를 법률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축출이혼 ::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가 잘못 없는 상대 배우자를 혼인관계 파탄을 이유로 사실상 가정에서 내쫓는 이혼 형태. 위자료와 재산분할 등을 해주지 않기 위해 재산을 미리 차명으로 빼돌린 뒤 빈손으로 내쫓을 수도 있다.

조동주 djc@donga.com·신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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