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논설주간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지켜야 할 품격 있는 언어, 예절, 신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대선 집회에 나온 관중은 그의 막말에 열광하고,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공격할 때마다 박수를 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카지노에서 도박 중독자들의 지갑을 털어 부를 축적했다.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면서 마피아와 연루됐다는 의혹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퍼게이트를 조사하는 데 천문학적 예산을 쓰고, 모델과 요트에서 밀회하는 장면이 들통 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상원의원이 중도 하차했던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아무도 트럼프의 문란한 사생활과 기업윤리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처음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는 지금 공화당 후보 중에서 지지율 1위다. 과연 트럼프는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을까. 영국의 유력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환상’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이것 자체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곤경에 처해 있음을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트럼프가 뜨는 원인을 대중의 소외(public alienation)에서 찾았다. 미국인 10명 중 3명 정도만 워싱턴에서 그들의 견해가 대변되고 있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할 정도로 다수가 정치적으로 소외돼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중산층의 소외의식을 파고든다.
트럼프의 인기는 미국 민심의 흐름에 뿌리가 닿아 있기 때문에 대외정책 관련 발언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섬에 건설한 활주로에 대해 “그 섬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죠”라고 말했다. 중국의 팽창주의에 크게 개의치 않는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환율 조작과 외국 상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거론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도둑이 중국”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부자 나라 한국을 미국이 지켜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이렇게 돈이 많은 나라를 보호해주고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른 한국의 역할을 강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된 나라에서도 선동가들이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도 주류 후보가 당선되던 전통이 이번에도 계속되리라는 확고한 보장은 없다. 다가오는 2017년 한국 대선에서도 포퓰리스트 선동가가 돌풍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뜻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정치적 소외의식을 느끼는 대중의 갈증을 얼마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