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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사 명장면]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입력 | 2015-09-19 03:00:00

[광복 70년]“3년간 광부 5000명 獨 파견”… 지급보증 각서 쓰고 돈 빌려




1964년 12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독일 루르 탄광에서 파독 광부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후대에는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연설에 행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박 대통령도 목이 메어 연설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파독 광부들이 석탄을 캐고 있는 모습. 지하 1200m 갱도에서 더위와 분진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60kg에 육박하는 쇠기둥을 하루에 80개씩 세우는 일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작업이었다. 동아일보DB

1963년 12월 21일 한국인 123명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서독으로 가는 파독(派獨) 광부 1진이었다.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을 향한 16시간의 비행을 앞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꿈을 이뤄 보려는 열정이 가득했다. 석유 파동과 외국인 근로자가 사회 문제화하면서 독일이 중단 결정을 내린 1977년까지 독일에 간 한국인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독일 차관을 성사시킨 광부 임금

올해 영화 ‘국제시장’으로도 잘 알려진 근로자 파독은 그 결정 과정이 울분과 비참함으로 점철돼 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 차관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답은 노(No).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줄 순 없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군사정부에 대한 반감이 진짜 이유였다. 정부는 독일을 대안으로 택했지만 난관은 여전했다.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차관 교섭단이 그해 12월 독일에 도착했지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경제장관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통역을 담당한 백영훈 당시 중앙대 교수가 인맥을 써서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을 만난 다음 날에야 장관 면담이 성사됐다. 어렵사리 1억5000만 마르크(약 3500만 달러)의 상업차관 제공 약속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지급보증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보다 못했던 한국의 경제 사정이 ‘죄’였다.

백 교수는 “지급보증을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독일에서 죽어 버릴 것”이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신응균 주독 한국대사가 ‘한국인 광부 5000명을 3년간 서독으로 보낸다’는 각서를 쓰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됐다. 광부가 부족한 독일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한국의 상황이 서로 맞아떨어진 것. 1961년 초 주한 미국경제원조기구(USOM)의 중재로 광부의 독일 파견을 논의한 전례도 도움이 됐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지하 갱도에서 3년을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64년 12월 첫 유럽 방문에 나선 박 대통령이 루르 탄광을 방문했을 때 환영식장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건 유명한 얘기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피눈물이 납니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라는 박 대통령의 연설에 광부들은 “아이고, 아이고”라며 울음으로 답했다.



광부 파견과 다른 간호사 파견 과정

광부 파견이 정부 차원의 결정이었다면 간호사 파견은 독일에서 의사로 있던 이수길 박사 개인의 공이 컸다. 1965년 초 서독에 간호사 3만 명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마인츠와 프랑크푸르트 병원 10여 곳에 ‘한국 간호사 고용 요청’ 편지를 보내고 직접 만나 설득해 1965년 7월 간호사 210명의 채용 약속을 받아냈다. 이 박사는 “당시 파독 간호사가 받을 초봉은 632마르크(당시 환율로 약 4만5000원)로 장관 월급과 비슷했다”며 “파독이 한-독 상호 이익 증진과 우호관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당초 한국 정부는 이 약속을 반신반의했으나 이만섭 의원(전 국회의장)의 중재로 보건사회부 장관 등을 만난 이 박사가 담판을 지은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간호사 선발시험이 치러지고 이듬해 1월 31일 파독 간호사 1진 128명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정부기관인 해외개발공사가 선발 과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2차 간호사 파독부터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이 박사를 청와대로 따로 불러 파독 성사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파독 광부, 동백림 사건으로 풍상 겪기도

하지만 선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종 비리와 주선료 이중 수수 등 잡음도 생겼다. 1966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한국 보건을 위해 간호사를 양성했는데 대량으로 독일로 보내면 안 된다”고 제동을 걸기도 했고, 독일 정부도 “한국도 간호사 부족으로 국민 보건에 지장을 초래한다”며 간호사를 받지 않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발표됐던 1967, 1968년에는 파독이 일시 중단된 적도 있다.

1967년 7월 발표된 ‘동백림 사건’은 독일 동포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중앙정보부가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으로 이름 붙인 이 사건은 재독 동포와 유학생 등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동베를린의 주독 북한대사관을 접촉하면서 간첩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중앙정보부는 파독 광부를 포함해 재독 동포 194명을 강제 연행했고 이수길 박사도 이때 한국으로 연행돼 왔다. 당시 독일 유학생 3분의 1이 연루됐고 교민사회는 풍비박산되다시피 했다. 일부 용공 혐의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지나치게 키워졌다는 지적이 지금도 나온다. 동백림 사건 관련자 전원은 1970년 광복절(8·15)을 기해 형 집행 면제로 석방됐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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