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그때 그 광부-간호사들
파독(派獨)을 단행한 사람들 가운데는 광부, 간호사 생활을 토대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 적지 않다. 김영희 전 주(駐)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김 전 대사는 전주여고를 졸업한 뒤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서울 중구청에서 근무하다 1972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행을 택했다. 그는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내팽개치고 스물한 살 나이에 독일로 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에게 독일은 까마득한 외계만큼 멀게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9개월 이론 수업과 3개월 실습만 받고 1972년 8월 27일 독일 쾰른에 도착해 이튿날부터 시작한 간호보조원 생활은 고행이었다. “온갖 보조기구를 몸에 매달아 100kg이 넘는 남자 환자를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에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먹이고 씻기는 일은 골병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파독 간호사 생활이 차별과 냉대와의 싸움이라면 파독 광부 생활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지하 1200m 막장에서 ‘스템펠(stempel·쇠기둥)’을 하루 80개씩 세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쇠기둥 1개의 평균 무게는 60kg 안팎. 당시 파독 광부의 평균 체중이 63kg이었다. 한국인 광부 가운데 지하에서 쇠기둥을 붙잡고 울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광부 생활을 겪으면서도 교수가 된 사람이 적지 않다. 아헨대 박사 출신의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1964년 광부로 독일에 갔다가 아헨공과대 사범대학에 입학한 첫 외국인이 됐다. 한국을 떠난 지 15년 만인 1979년 교육학 박사가 돼 귀국한 그는 한국교원대 교수와 한국청소년개발원장을 역임하면서 국내에 평생교육개론, 청소년교육개론 등을 소개했다. 현재는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교육후원회장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석종현 단국대 명예교수도 40도를 오르내리는 갱도 속에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인가’라는 회의를 느낄 만큼의 고통을 이겨내고 법학 박사학위를 따 고국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신 씨는 “3년 계약만 끝나면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인생이 계획만으로 안 되더라”며 “우리 세대가 당시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한 것처럼 현 세대도 시대에 맞춰 현명하게 최선을 다해 잘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