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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날치기, 한국과 일본의 차이

입력 | 2015-09-23 03:00:00

집단적 자위권 처리에 몸싸움 일본은 ‘强行採決’이라 표현
날치기는 범죄적 낙인찍기 민주화 이후 적절성 상실 ‘강행처리’로 순화할 필요
선진화법으로 몸싸움 사라진뒤 소수만 지지하는 법 꼼수 통과 이것이 진짜 날치기다




송평인 논설위원

일본 의회의 안보법 처리 과정에서 여야 의원이 뒤엉켜 몸싸움하는 사진이 한국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우리 국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언론은 날치기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아니 일본 의회의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보도한 한국 언론이 적지 않았다. 일본은 자기 나라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쓰지 않지만 우리는 남의 나라 일인데도 날치기라고 쓴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다.

일본은 강행채결(强行採決)이란 말을 쓴다. 우리에게도 강행채결과 비슷한 강행처리란 말이 있지만 날치기라는 용어가 더 선호된다. 본래 날치기는 피해자가 보는 앞에서 물건을 빼앗아 가는 범죄 행위다. 일본에도 범죄 행위로서 날치기를 뜻하는 갓바라이 같은 용어가 있다. 하지만 법안의 강행처리를 지칭하는 말로는 쓰지 않는다.

강행채결이든 강행처리든 강행이란 말 속에 어느 정도 비판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다. 소수당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지 수적 우세만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강하게 비판하면 다수(多數)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과 모순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날치기 같은 용어는 쓰지 않는다. 법안의 강행처리를 범죄를 연상케 하는 날치기로 지칭하는 것은 순전히 한국적인 언어 습관이다.

한국 정치에서 날치기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정당성이 부족한 다수당의 전제를 견제하려는 시도에서 야권과 언론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87년 이후 민주헌법에 따라 정당한 정권과 의회가 탄생하고 두 차례의 정권 교체와 한 차례의 의회권력 교체까지 이뤄진 뒤에도 날치기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일본 의회에서는 이번 안보법안만이 아니라 1999년 통신감청법안, 2003년 이라크 조치법안, 2004년 국민연금 개혁법안이 야당의 방해 속에 질의와 토론도 없이 강행처리됐다. 강행처리 때마다 야당으로부터 무효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언론은 그 말을 정치적 비판의 용어로 받아들이지 법적 효력을 다투는 용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서 안보법에 반대하는 여론이 50%를 넘고 의회에서의 처리 방식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여론은 70%에 가깝지만 안보법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언론은 없다. 다만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조항을 고치지도 않고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든 데 대해 위헌법률소송이 추진되고 있을 뿐이다. 일본 헌법이 다수결을 전제로 하는 이상 강행처리로 입법된 것이라 하더라도 법률의 효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관념이다.

한국에서는 2009년 언론관련법이 당시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로 통과됐을 때 어느 신문은 ‘용납할 수 없는 의회 쿠데타’라는 제목을 달고 ‘원천 무효’를 주장했다. 당시 민주당은 의안 상정을 방해해 강행처리의 원인을 제공하고도 강행처리는 무효라며 헌법재판소로 끌고 갔다. 헌재는 민주당의 무효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회가 스스로 판단할 일로 돌려보냈어야 할 사안을 심사한 끝에 ‘위법하나 무효로 할 수 없다’는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날치기 공세는 직전 국회에서 가장 극성이었다. 민주당은 각종 쟁점 법안에 날치기 공세를 편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매년 내는 예산안까지 날치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날치기 공세와 그로 인한 몸싸움을 막는다고 만든 것이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은 잘못된 처방이다. 그것은 물 버린다고 물통에 든 아이를 함께 버린 것과 같다. 날치기 공세도 몸싸움도 사라졌지만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원칙도 함께 사라졌다. 그 대신 소수가 다수의 의사 관철에 일상적으로 제동을 걸고, 그 제동을 풀어주는 대가로 소수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체제가 등장했다.

국회선진화법은 실은 뒷문으로 몰래 진짜 날치기를 불러들였다. 다수가 관철시킨 법안은 소수파의 저지 때문에 불가피하게 강행처리되는 형식을 취한다 해도 여전히 다수의 의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을 강행처리라고 부를지언정 날치기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수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법안이 어떤 꼼수를 통해 통과된다면 그것은 날치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60년 전 그 꼼수는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이었다. 오늘날 그 꼼수는 법안연계처리라고 불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