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0월호/특집 | 충돌위기 이후 한반도] 8·25 합의 정밀 복기(復棋) ● 北 제파식 공격과 작계 5027의 ‘거부작전’ ● 北 미사일 공격에 대응한 ‘참수작전’의 비밀 ● 북한의 ‘뻥쇼’, 1년치 연료 다 써버린 잠수함부대 ● 무사만루 기회를 1득점으로 끝낸 청와대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사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귀빈들.
8월 22일 어간 전쟁이 날 뻔했다. 김정은이 사상 최초로 최후통첩과 준전시, 전시상태를 한꺼번에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매체들이 준전시라 주장하고, 황병서와 김양건이 사태를 가라앉힘으로써 전쟁은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는 북한과 김정은의 ‘내공’을 짐작게 하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으쓱’해진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이 사건을 겪고 중국 전승절 행사에까지 다녀온 박 대통령은 ‘통일외교’를 외쳤다.
그는 통일 단초를 잡아놓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말로 하는 ‘통일대박’ ‘통일외교’ 말고, 통일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는 행동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북한의 때리고 어르기 전술
전쟁의 기운은 남북이 포격을 주고받은 직후인 8월 20일 오후 5시쯤 인민군 총참모부가 서해의 군(軍) 통신선으로 전통문을 보내오면서 감돌기 시작했다. 인민군 총참모부는 ‘8월 20일 17시부터 48시간 내 대북 심리전 방송 중지하고 모든 수단을 전면 철거할 것,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군사적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해왔다.
5시 10분쯤, 이를 보고받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소집을 지시했다. 6시부터 열린 이 회의에서 최윤희 합참의장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북한의 도발 개요와 우리 군의 대응 태세 등을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북한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고 만전의 대비 태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민 안전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이 이를 따라 했다. 그날 밤(북한 발표에 따르면 11시 전으로 추정됨)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 긴급 소집한 것. 이에 대해 조선중앙방송은 “(다음 날인) 21일 17시부터 조선인민군 전선 대련합부대들이 진입이 가능한 완전무장한 전시 상태로 이전하며, 전선지대에 준전시 상태를 선포함에 대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김정은을 가리킴) 명령을 하달했다”고 보도했다.
인민군의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
전선지대에는 바로 준전시임을 선포하고, 전선 대련합부대는 다음 날 오후 5시부로 전시 상태로 이전하라는 ‘이원적’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전선 대련합부대’이다.
1차 대전 때까지의 지상전은 보병이 전선을 따라 길게 참호를 파고 그 위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기관총이 불을 뿜는 한 진지는 돌파하기 어려웠다. 그때 영국 육군이 무한궤도 위에 기관총탄을 견뎌내는 강판을 두르고 역시 기관총을 쏘며 전진할 수 있는 ‘원시 전차’를 개발했다.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열강은 전차 개발에 매진했다.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3호 전차를 앞세운 독일 육군은 프랑스가 국경선을 따라 구축해놓은 강력한 진지인 마지노선을 우회 돌파했다. 그리고 돌파구를 확대해 전 전선에서 공격해 들어가고, 기갑부대를 계속 돌격시켜 단시간에 전략거점(Center of Gravity)을 점령했다. 개전 35일 만에 파리를 점령한 것. 그후 전격전은 보편화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여기에 항공력을 추가해 ‘공지(空地)기동전’ ‘입체고속기동전’을 만들어냈다. 항공기와 미사일로 적을 격멸한 후 전차와 보병을 태운 장갑차를 돌격시키는 것이다.
소련군은 항공력이 부족해 공지전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병력이 월등히 많아 기갑(전차)은 물론이고 보병부대까지 대량으로 반복 돌격시켜 구멍을 내고, 그곳으로 기동부대를 진격시킨다는 개념을 세웠다. 1파, 2파, 3파의 반복된 공격으로 구멍을 내는 것을 ‘제파식(諸波式) 공격’, 뚫은 통로로 기동부대를 투입해 승기를 잡는 것을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이라고 한다.
무사만루의 기회를 1득점으로 끝내버린 8·25 합의. 김관진 안보실장(오른쪽)이 황병서 총정치국장과의 합의를 서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을 모두 끌고 나가는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사진제공=통일부
국군은 밀집방어로 대응한다. 여덟 개 군단 가운데 7군단만 ‘예비’로 남겨놓고, 수도-1-5-6-2-3-8의 일곱 개 군단을 GOP선에 촘촘하게 세워놓은 것이다.
전쟁에서는 공자(攻者)가 주도권을 행사하므로 방자(防者)는 종속변수가 된다. 북한 군단은 공격 지점을 선택해 부대를 집중할 수 있으니 공격 지점에서는 인민군 세력이 우세해진다. 기만전술도 추가한다. 소수 전력을 엉뚱한 곳으로 침투시켜 방자가 주력이 투입되는 곳으로 부대를 보내 두텁게 막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제파식 공격을 퍼부으니 국군의 GOP(일반전초) 방어선은 뚫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통로가 열리면 인민군은 20만 명에 달한다는 특작부대(게릴라부대)도 동원한다. 이들을 AN-2기나 직승기(헬기)에 싣고 가서, 기동부대가 가려는 길 좌우로 뿌려 기동로를 확보해주는 것이다. 기동부대는 이들을 장갑차에 태워 전력거점까지 돌격해 풀어놓는다. 서울로 스며든 이들은 큰 건물을 장악하고 그곳의 시민을 인질로 잡는다. 인질 때문에 마지막 방어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다.
‘6일전쟁’과 거부작전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미연합군은 작전계획 5027에 공군과 육군 포병이 중심이 된 ‘거부작전’을 마련해놓았다. GOP선 뒤에 알파-브라보-찰리-델타라는 가상선을 정해놓고, 그중 한 선에서 GOP선을 돌파한 인민군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우리 군은 GOP선에서 민간인 통제선 사이를 ‘FEBA(Forward Edge of Battle Area, 전투지역전단)지역’으로 부르며 ‘비워’뒀다. 그곳이 강력한 화력을 퍼부어 GOP선을 돌파한 인민군을 격멸하는 거부작전의 무대다.
1967년 이스라엘군이 거부작전의 ‘절정’을 보여줬다. 병력이 월등히 많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양쪽에서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펼치려고 대부대를 집결시키자, 이스라엘은 공군기를 기습적으로 출격시켜 그 지점을 타격했다. 이 폭격으로 두 나라 군대가 궤멸하면서 우왕좌왕하자, 이스라엘은 거꾸로 기갑부대를 돌격시켜 6일 만에 승리를 거머쥐었다(6일전쟁).
한미연합군도 이러한 거부작전을 하고 싶기에 ‘정찰’에 총력을 기울인다. 북한군이 기동할 조짐을 보이면 워치콘(대북정보감시태세)을 상향해 정찰전력을 배가하는 것이다. 평시엔 워치콘 4를 유지하는데, 그때는 한국의 금강 정찰기와 미국의 U-2기를 하루씩 번갈아 띄워 북한 지역을 정찰한다. 목함지뢰 사건 후 워치콘은 3으로 격상됐다. 그렇게 되면 오전엔 금강, 오후엔 U-2식으로 정찰비행을 크게 늘린다.
한미연합군이 강력한 ‘역격(逆擊)’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인민군에겐 스트레스다. 이 부담을 뚫고 서울까지 진격하려면 전연군단과 후방의 기동부대 간에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전연군단이 큰 희생을 치르며 통로를 개척했는데, 한미연합군의 강력한 역격을 겁내 기동부대가 돌격하지 않으면, 기진맥진한 전연군단은 궤멸된다. 이 때문에 인민군이 작전회의를 열면, 기동부대의 돌격 문제를 놓고 전연군단장과 기동부대장이 싸움을 벌인다고 한다.
이 문제를 죽기 직전의 김정일이 정리했다. 김정일은 전연군단장들의 주장이 옳다고 보고, 평시 두 부대는 독립적으로 작전하지만, 유사시가 되면 전연군단장이 기동부대를 작전통제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온 말이 ‘전선 대련합부대’다. 전선 대련합부대는 평시에는 한 개 군단이지만, 유사시에는 2개 군단이 된다.
26사단 포병이 사격한 이유
8월 20일 이후 북한이 이러한 공격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됐기에, 우리군은 역격이 포함된 대응책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북한의 행태가 ‘때리고 어르기’라는 데 주목했다. 북한은 8월 20일 오후 4시 전후 28사단 지역으로 14.5㎜ 고사총 1 발과 76.2㎜ 평사포 2발을 발사하고, 4시 50분쯤 김양건 명의로 김관진 안보실장 앞으로, “현 사태를 수습하고 관계 개선을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오후 5시쯤, 서해 군 통신선으로 앞에서 밝힌 최후통첩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묵살 전략으로 나가기로 했다. 5시 15분 26사단 포병대대로 하여금 K-55 자주포 29발을 발사하는 것으로 응답한 것이다. 북한은 28사단 지역으로 포탄을 쐈는데, 26사단 포병대대로 하여금 대응사격을 하게 한 것은, 그 지역에서는 26사단 포병대대가 최고의 사격술을 가졌기 때문이다.
28사단이 관할하는 무적태풍전망대 앞 비무장지대에는 유명한 격전지 ‘베티 고지’가 있다. 26사단 포병대대는 그 고지 앞 북한 쪽 비무장지대 200×400m 지역에 29발을 모두 떨어뜨리는 ‘놀라운‘ 사격술을 펼쳤다.
그리고 6시쯤 박 대통령이 NSC를 열어 단호한 대처를 주문했다. 북한도 강공으로 나왔다. 그날 밤 노동당 중앙군사위를 열어 준전시를 선포하고, 21일 오후 5시부로 전선 대련합부대의 전시 전환을 지시한 것이다.
다음 날(21일) 박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육군 3군사령부를 방문해 “북한 도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우리도 ‘때리고 어르는 전술’로 나갔다. 합참과 통일부가 북한에 대화하자는 통지문을 보낸 것이다.
북한은 김이 빠졌는지 더 이상 때리는 전술을 펴지 않았다. 전선 대련합부대가 전시로 전환하기 1시간 전인 오후 4시, 김양건이 ‘23일 판문점에서 김관진 실장과 1대 1 접촉을 하자’는 응답을 보내온 것이다. 오후 6시, 한국은 ‘회담을 하려면 총정치국장 황병서가 나오라’고 대꾸했다.
다음 날(22일) 오전 9시 35분, 북한은 ‘황병서가 김양건과 나갈 터이니 김실장은 홍용표 통일부장관과 나오라’고 했다. 한국은 대답을 주지 않고 오전 11시쯤 휴전선 남쪽에서 발사해 평양의 핵심 시설도 격파할 수 있는 슬램-ER 탑재형 F-15K 전투기를 미 공군기(F-16)와 함께 출격시켜 시위비행을 하게 했다 그리고 25분 뒤 ‘좋다’는 답을 보내자, 12시 45분 북한도 OK를 보내왔다.
‘때리고 어르는 전술’은 우리 것이 통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때까지 북한군이 일부 포병부대를 ‘방열(사격준비)’시킨 것은 확인됐지만,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구사하려 기동에 들어간 기미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가진 청와대는 북한이 말한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 남긴 오후 3시, 판문점 접촉을 발표했다.
오후 6시 30분 판문점 회담이 열리자, 황병서와 김양건은 대북확성기 철거만 집요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등을 요구했기에, 회담은 평행선을 달렸다.
CCTV로 이를 지켜본 우리 관계자들은 황과 김이 김정은에게 받은 지시가 대북확성기 철거 하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양측은 1시간쯤 자기주장을 펼치다 목이 아팠는지, 입을 다물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이 ‘침묵의 지겨움’은 23일 오전 4시 15분, 정회를 함으로써 겨우 마무리됐다.
우리 군은 ‘북한은 말로만 싸운다’ 고 판단하고 자신감을 가졌다. 2차 회의는 23일 오후 3시30분 시작됐다. 그때 동·서해의 북한 잠수함 기지에 계류해 있던 잠수함정 50여 척이 사라진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인민군이 전시상태로 전환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긴장했다.
북한 해군의 수상함 전력은 우리에 비해 현저히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해군이 펼칠 수 있는 작전을 두 가지로 추정해왔다.
첫째, 수적으로 많은 잠수함정을 풀어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는 것이다. 우리 항구를 봉쇄하고 우리 수상함을 공격해 우리 함정들이 작전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성공했다고 판단되면, 두 번째로 공기부양정을 비롯한 모든 수상함에 특작부대인 해상저격여단원을 태워 초고속으로 인천이나 경기의 서해안으로 돌진시킨다.
北 잠수함정 기동의 한계
해안에 상륙한 해상저격여단원들은 해안가에 있는 건물을 장악하고 시민을 인질로 잡아 출동한 한국군과 대치한다. 옆구리가 찔린 한국군이 움찔할 때 군사분계선에 대기하던 인민군 전연군단이 제파식 공격으로 돌파구를 뚫고 그 틈에 특작부대를 대동한 기동부대가 서울로 돌격해 ‘역시’ 인질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북한 잠수함정들은 기지를 이탈했는데 전방지대에선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을 위한 인민군의 기동 움직임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 군은 북한이 열세를 보인 회담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쇼’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만큼 인민군이 전시 상태로 전환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
북한 해군은 84척의 잠수함정을 가졌는데, 가동할 수 있는 것은 70척 이하로 판단된다. 그중 수리해야 하는 배가 있으니 실제로는 50척 정도가 움직일 수 있다.
평소 북한 해군은 1주일에 한두 척의 잠수함정을 출동시켜왔다. 바다가 어는 겨울 3개월 동안엔 기동하지 못하니(52주 중 12주) 연간 잠수함정 출동횟수는 40~80회, 어림잡아 50~60회가 된다. 잠수함정이 많은데도 이 정도밖에 잠수함을 출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연료 부족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갑자기 50척을 풀었다면, 잠수함 부대에 배정된 1년치 연료를 다 쓰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한 전문가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50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주목했다. 한미연합군은 워치콘을 2로 올려 더 많은 정찰 자산을 가동했다.
북한 잠수함정(연어급과 상어급)은 소형이라 하루에 2~3번 부상해 공기를 주입해야 계속 잠항할 수 있다.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정찰위성이나 초계기 등으로 찾아낼 수 있다. ‘예상 대로’ 북한 잠수함기지 앞바다에서 공기 주입을 위해 부상하는 잠수함정이 자주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태풍 ‘고니’가 북상하는 것에도 기대를 걸었다. 태풍이 불어와 파고가 높아지면, 공기 주입을 위해 수면으로 부상한 잠수함정은 파도에 휩쓸려 쓰러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잠수함정 하부에 있던 황산 등 배터리 용액이 흘러나와 승조원들이 사망할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잠수함정은, ‘황천(荒天)’이 예보되면 ‘황천(黃泉)’으로 가지 않기 위해 전부 기지로 돌아온다. 전문가들은 고니가 접근하면 자동으로 ‘북한의 잠수함 쇼’가 중단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로미오급 등 큰 잠수함 몇 척은 공격을 위한 침투를 할 수도 있으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지 주변에 숨은 북 잠수함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만난 4인은 같은 얘기를 주고받다 다시 길고 긴 침묵에 들어갔다. 날이 바뀌어 24일 오전 10시가 되자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날 박 대통령은 “우리 대표단을 그만 철수시키라”는 지시를 두 번이나 내렸으나 실무진이 반대해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의 직후 우리 군은 미군의 B-52폭격기와 공격 원자력잠수함을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을 미국과 협의한다고 발표했다. 잠수함정을 푼 북한에 슬쩍 겁을 줘본 것이다.
회담이 삐걱대며 이어지던 24일 오후 3시 30분쯤, 서해 북방한계선(NLL) 60㎞ 북쪽의 고암포에 북한의 공기부양정 20여 척이 출동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잠수함정 출동에 이어 북한은 2단계 해상작전을 준비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쇼를 강화한 것인가. 그때 군사분계선 북쪽 일부 전선에서는 침투를 주임무로 하는 인민군 특작부대들이 DMZ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발견됐다.
우리 군은 북한 쪽에선 볼 수 없는 곳에 확성기를 설치했기에 북한은 절대로 확성기를 격파할 수 없다. 따라서 특작부대를 우리 쪽으로 침투시켜 확성기를 부수려는 것으로 추정됐다. 물론 쇼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마비전의 핵심 ‘작계 5015’
전쟁은 고전적인 방법(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 등)으로만 하지 않는다. 금세기 들어 주요 국가들은 미사일과 항공력을 무한정 투사해 적군 지휘부와 공군 및 미사일 기지 등을 파괴하고 육군을 투입하는 ‘마비전’을 발전시켰다. 미사일과 항공력을 투입하는 동안 전선의 적군은 살아 있지만, 지휘부와 전략시설은 다 깨졌기에 꼼짝을 하지 못한다. 마비된 상태로 있는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육군 기동부대를 투입해 섬멸한다. 2003년 미국이 펼친 ‘이라크 자유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도 600여 기로 판단되는 스커드-B와 노동미사일을 갖고 있으니 이를 일제히 발사할 수 있다. 핵탄두가 완성됐다면 그것을 단 대포동도 쏠 수 있다. 이것이 초전에 승부를 결정짓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이용한 북한판 마비전이다.
지난 2년간 북한은 무더기 미사일 발사 훈련을 반복해왔으므로 대량군주의적 기동전술과 마비전을 동시에 펼칠 수도 있다. 그 신호가 잠수함정과 공기부양정, 특작부대를 가동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한 것이 작전계획 5015다. 이 작전은 북한이 미사일을 대량으로 기립(起立)시켰는지를 확인하고 단행한다. 이를 위해 미 공군 우주사령부는 KH-12 등 정찰위성을 북한 상공으로 띄워 깊이 내려가게 해,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케 한다. 한국도 아리랑위성 등을 총 가동해 같은 작전을 펼친다. 그리하여 북한이 미사일을 대량 기립시킨 것이 발견되면, 우리 군의 현무-1, 2, 3과 ATACMS, 미 8군의 ATACMS, 미 해군의 토마호크 미사일 등을 일제히 발사해 북한 미사일 기지를 선제 타격한다.
이 작전은 신속성이 생명이므로 데프콘이나 워치콘의 상향 같은 예비조치 없이 곧바로 단행된다. 이는 바로 김정은을 노리는 것이라, 일명 ‘참수(斬首, 목을 베 죽이는 것)작전’으로도 불린다. 이것이 김정은에게는 공포이기에, 북한은 나름대로 훈련을 예고한 뒤에 미사일을 쏘는 훈련을 해왔다.
그런데 그때는 북한이 전시로 전환한다고 선포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 육군 미사일사령부와 공군 작전사령부는 비상 대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은 미사일을 집단으로 기립하지 않았다.
준전시를 선포하면 북한은 교도대와 노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같은 예비군을 동원해야 한다. 이들의 수는 700만으로 추정되는데, 동원 이후 이들의 ‘입’은 120만의 인민군이 채워줘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식량이 부족한 인민군이 동원한 예비군에게 얼마나 식량을 줄 수 있을까는 큰 궁금증이었다. 북한은 전선지대의 예비군을 ‘끝내’ 동원하지 못했다.
북한의 속셈을 짐작한 이들은 북한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로 인해 북한의 내부 모순이 격화되도록 2+2 회담을 서두르지 말고 계속 끌라는 주문을 했다. 합의가 늦어져 긴장이 계속되면, 박 대통령을 전승절 행사에 참가시켜야 하는 중국이 몸이 달아 북한을 압박할 것이라는 계산도 했다. 이는 북한과 중국의 틈을 벌어지게 하는 묘책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여름 박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를 이유로 미국 방문을 취소했다. 한반도 긴장을 이유로 박 대통령이 방중(訪中)을 취소하면 미국과 일본은 쾌재를 부르고, 중국은 북한을 더욱 미워할 수 있다. 합의 지연이나 실패는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에 대해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됐다. 태풍 고니도 우리 편이었다. 물론 타협이 늦어지면 북한은 더 큰 위협으로 긴장감을 높였을지 모른다. 이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전략적 인내’를 해야 한다.
이병기 “타결 서둘러라”
북한을 오래 다뤄온 국가정보원 쪽은 이렇게 판단했으나 청와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이 박 대통령과 가깝지 못한 것이 한 이유로 지적된다. 전임 국정원장인 이병기 비서실장은 국정원 판단과 반대로 경기 침체와 대통령의 방중을 위해 우리 대표단에게 조속히 타결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 실장의 의중을 따랐다. 전문가들의 판단보다는 대통령을 위한 ‘정무적 판단’을 우선시한 것이다. 허망하게도 24일 밤, 우리는 유감 표명을 받는 선에서 타협하고, 다음 날 오전 2시 이를 발표했다.
중국은 전승절에 참여한 박 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로 인해 30%도 안 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이 50% 이상으로 치솟았다. ‘공간’을 얻은 박 대통령은 시진핑 등에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 의견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공식 방침은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이다. 우리의 발언이 이 범위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반대를 표시해 전승절 행사에 어렵게 모신 ‘서방 인사’를 노엽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8·25 합의 후 북한 중앙방송에 출연한 황병서는 “남조선은 심각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관진 실장이 합의해주지 않고 회담을 끌었다면, 그리하여 박 대통령이 방중을 하지 못했다면, 중국은 북한에 크게 화를 냈을 것이고, 김정은은 그 화를 황병서에게 퍼부었을 것이다. 황병서는 제2의 장성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8·22 위기로 가장 큰 위험에 빠졌던 이는 황병서다. 죽다 살아난 그가 흰소리를 했다.
아쉬운 박근혜의 회군
북한 급변사태는 김정은이 장성택, 현영철에 이어 황병서 등 실세들을 불신해 처형하고, 그로 인해 김정은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불안해진 2인자급들이 ‘거꾸로’ 김정은을 제거하는 형태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북한 급변사태가 일어나면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전승절 참석 이후 박 대통령은 어깨가 으쓱해져 ‘통일외교’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통일의 단초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측근들에게 휘둘려 ‘결정적인 회군’을 해버렸다. 그 좋은 기회를 지지율을 높이는 데 다 쓰고 말았다.
비유해 말하면 8·22 위기는 다득점을 할 수 있는 ‘무사만루’의 기회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압박 수비를 했는데, 그 분위기에 휩쓸려 1점만 내고 공격을 마무리했다. 합의를 하지 않고 끌었더라면 연속 득점으로 북한, 미국, 중국, 일본을 우리 페이스로 끌고 가는 연속득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아주 잘했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통일대박’이 박 대통령의 비전이라면 그는 관료와 국민에게 ‘전략적 인내’를 주문해야 한다.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북한은 로켓 발사를 시도할 수 있다. 그 직전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하고 그 직후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서는 또 한 번 큰 판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는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은 끈기가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다시 기회가 왔을 때 국민과 함께 ‘전략적 인내’를 발휘한다면 통일대박은 현실화할 수 있다.
통일대박을 준비한다면 박 대통령은 병력을 줄이는 국방개혁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적은 병력으로는 북한 급변사태 때 안정화 작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을 고대한다면 박 대통령은 우리 군을 정예화하고 북한 전문집단인 국정원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인방을 중심으로 한 측근의 정무적 판단에 경도되지 말고.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