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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첫해의 대형 스크린 세우던 감동…영원히 잊을 수 없죠”

입력 | 2015-09-30 03:00:00

부산국제영화제 20년 산증인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을 만나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부터 제15회 영화제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인 영화제 개최의 주역으로 불리는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 그는 “올해 부산에서는 여유있게 영화를 좀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내한하는 허우샤오셴 감독과 오픈토크 행사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중국 베이징, 카자흐스탄 알마티, 일본 도쿄, 호주 브리즈번….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78·사진)이 올가을 방문할 해외 도시들이다. 각종 해외 영화제와 관련 행사로 김 위원장의 스케줄은 빈틈을 찾기 힘들다. 이런 그의 ‘마당발’은 후발주자였던 부산국제영화제가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부산국제영화제 20년의 산증인인 그를 서울 종로구 운니동 부산국제영화제 서울사무소에서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이했다.

“아직도 처음 집행위원장을 제안받았던 날이 생생하다. 1995년 8월 1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이용관 중앙대 교수(현 집행위원장)와 김지석 부산문화예대 교수(현 수석프로그래머), 전양준 평론가(현 부집행위원장) 등을 만났다.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열려고 한다’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했다. 주변 사람들은 ‘미쳤냐. 파산할 작정이냐’ 하고 대부분 말렸다. 하지만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부터 한국 영화를 해외로 알리기 위해 영화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5년 동안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나.

“첫해 개막 전 대형 스크린을 세울 때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커다란 스크린을 세우는 건 처음이어서 모든 스태프가 모여서 감탄했다. 2000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천사’를 야외 상영하는데 2000명 가까운 관객이 그대로 영화를 봤던 기억도 잊지 못한다. 영화제 초기 일정이 하도 바빠 택배 오토바이를 타고 부산 남포동에서 해운대를 오가던 기억, 그리고 남포동 극장거리 신문지를 깔고 앉아 밤새도록 지나가는 사람들과 소주를 마시던 기억도 난다.”

―영화제가 짧은 기간에 자리 잡고 20년을 이어온 비결은….

“부산국제영화제만의 색깔이 확실한 것이 비결이다. 아시아의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고 아시아 제작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해준다는 기조를 유지해왔다. 첫해부터 비경쟁 영화제를 지향하되 아시아 신인 감독에게 ‘뉴 커런츠 상’을 수여했다. 3회 때부터는 ‘부산 프로모션 플랜’을 열어 아시아권 감독과 투자자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영화제에서 영화 ‘다이빙 벨’ 상영을 놓고 집행위원회와 부산시가 갈등을 빚었고, 올해 영화진흥위원회 예산이 삭감됐다.

“최근 해외 영화제에 갔더니 ‘도와줄 일이 뭐가 있느냐’는 얘기들을 많이 하더라. 그때마다 ‘두고 봐라. 잘될 거다’라고 답했다. 지난해와 올해의 갈등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스무 살, 성년을 맞이하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 칸영화제도 1946년 창설된 뒤 정부와 갈등을 겪으며 1948년, 1950년에는 개최조차 못하지 않았나.”

―영화제 측이 작품 선정이나 상영에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동안 세계 여러 정부의 압력을 받았지만 상영하지 못한 영화는 없다. 1996년 장위안 감독의 ‘동궁서궁’을 상영한 뒤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정부의 영화 담당 총국장이 ‘독립영화는 상영하지 말라, 골라놓은 작품 중에서 선정해 가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 뒤로도 2004년 왕자웨이 감독의 ‘2046’을 개막작으로 선정하고 중국 독립영화 10여 편을 초청하자 ‘개막작을 상영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압력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출품을 자진 철회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영했다.”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답하더라.

“강 위원장이 그 말 참 잘했다. 그동안 집행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영화제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강단 있게 잘 해나갈 거다.”

―중국이 상하이, 베이징국제영화제에 집중적으로 예산을 지원하고, 일본 도쿄국제영화제도 부활 조짐을 보이는데….

“특히 중국 영화제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다. 할리우드 감독, 배우도 쉽게 초청할 정도다. 하지만 영화제는 돈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영화를 선정하느냐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위상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를 선정하고, 월드 프리미어 작품 등을 조금씩 더 늘린다면 전망은 여전히 밝다.”

―2년 동안 맡아왔던 문화융성위원장직에서 최근 퇴임했다.

“임기가 만료되던 8월 18일 바로 사무실에서 짐을 뺐다. 1년 임기인데 연임하면서 기반을 닦았다는 생각은 든다. 수많은 문화예술계 사람을 만났고, 이런 경험을 8대 국정 과제로 정리했다. 문화 분야는 단번에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앞으로 효과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나고 책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를 냈는데, 자서전 계획은 없나.

“아직 자서전 낼 군번은 아니고….(웃음) 영화를 한 편 더 연출하고 싶다. ‘주리’(2013년)에서 영화제 심사위원 이야기를 다룬 뒤로 자원봉사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을 준비했었다. 주연 배우도 정하고, 허우샤오셴 감독이 카메오 출연하기로 일정까지 잡아뒀었는데 내가 문화융성위원장을 맡으며 미뤄졌다. 그런데 장편영화도 구상하고 있어 어느 쪽이 제작될지는 아직 모른다.”

―장편 연출작을 꼭 보고 싶다.

“장편영화 연출하면 그날로 망하는 길이지. 남의 돈 끌어다 써야 하는데 수익을 낼 수 있겠나.(웃음)”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