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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죄송합니다’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가

입력 | 2015-09-28 08:12:00

[특집 | 역사 교과서 논쟁 -Global Asia-주간동아 특약]
일본이 사과를 꺼리는 이유, 강대국이 해명을 피하는 이유





국가 지도자는 좀처럼 사과하지 않는다. 혹시나 약해 보일까, 국가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까, 지지자들과 경쟁자들에게 밉보이진 않을까 등 다양한 우려가 머릿속을 스친다. 강대국이라면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애초 사과가 필요한 정책적 결정사항과 관련해, 지도자 자신이 책임을 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 지도자에 대한 암살 지령, 국내에서의 인종 및 종교 탄압, 재판을 거치지 않고 자행된 수감과 고문, 외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 모의, 다른 국가 영토에 대한 점령 같은 것이 그런 일들이다.

이 때문에 덩치 큰 나라들은 엄청난 파멸을 불러온 전쟁에서 패한 뒤에도 사과하는 법이 없다. 미국의 베트남전쟁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바로 그들이 전범, 학살,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당사자들이고, 그러한 범죄와 관련해 자신들은 어떤 고통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정에서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 유럽 주요국 관계자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해당 국가 지도자가 자신들이 저지른 무인기 공격, 융단폭격, 화학전, 기타 범죄 행위에 대해 해명하고 나서는 경우는 없다.

이언 부루마의 저서 ‘죗값(The Wages of Guilt)’은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지른 행위에 대해 얼마나 다르게 대응했는지를 심도 깊게 분석한 연구서다. 독일인은 대체로 자신들의 과거를 직시한 반면, 일본인은 황당하면서도 불분명하고 독선적인 행태를 보여왔다는 게 그 골자다. 한마디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비슷한 행동을 하기 어려운 이유다.

변명에서 흔적 지우기로

주지하다시피 브란트 전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일본 정치인 가운데 어느 누구도 1988년 필리프 예닝거 독일 연방 하원의장이 했던 것처럼 자국 국민 앞에서 역사 강연을 통해 일본이 어떻게 ‘전범국’이 됐는지를 설명할 리는 없을 것이다. 예닝거 의장 역시 당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데다, 일본은 전혀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일본 고위관료들은 이른바 ‘차별 없는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며 사과 문제를 회피할 방법을 고심해왔다. 원자폭탄 투하 역시 대량학살 행위였고 일본 제국주의 행보는 서양의 식민정책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반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왕과 군부의 범죄행위를 변호할 구실을 찾거나 최소한 그 무게를 줄이려는 시도를 해온 것이다.

물론 사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3년 이른바 고노담화를 통해 전쟁 중 일본군이 성 노예 행위에 가담했다고 인정했으며,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총리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행위를 인정했다. 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이 야기한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구한다”고 말했다.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해 간 나오토 총리도 담화를 발표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로 말미암은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구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 내 극우주의자와 여러 정부 관료는 이들 담화를 지속적으로 부정해왔고, 담긴 내용 또한 부인하고 있는 듯하다. 아베 총리가 집권한 이후에는 과거 행동에 대한 구실 찾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과거를 덮으려는 시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신민족주의자인 아베 총리는 일본 역사를 통해 자국 국민이 자존심을 되찾고, 국가 안보를 위해 군대의 기능을 쇄신하며, 일본 평화헌법 제9조를 수정해 일본 ‘자위군’이 해외에서의 집단 안보행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

아베는 과거 1기 총리 시절부터 스스로 역사를 부인하는 총리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징용하거나 인신매매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 게 대표적이다. 지금 아베 총리의 역사관은 변한 것이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를 나누며 “과거로부터 배우겠다”는 약속을 건네면서도, 일본의 과거를 직시하고 전임 총리들이 담화를 통해 전달했던 반성 표현을 그대로 계승할 기회를 여러 차례 회피해왔다.

관점을 달리해보자. 미국이 사과해야 할 행위 가운데 하나로 고문 문제가 있다. 미국은 국제평화와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수백 차례 해외 파병을 단행했고, 그 와중에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 물론 미군의 피해도 컸다. 고문 행위는 미국이 저지른 불법행위 중 하나에 불과하고, 미 상원 정보위원회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문 행위를 밝히기 위해 나선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 같은 인물은 고문 행위에 대해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무인기, 화학무기, 원자폭탄 등 현재 혹은 과거에 미국이 행한 집단폭력 행위에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해당 정책 결정과정에 관여했던 주요 전직 관료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고 인정한 후에도 미국 정부는 어떠한 공식사과도 남기지 않았다.

사과가 중요한 이유

혹자는 피해자 모두를 아우르고 달랠 수 있는 사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바라는 것은 응징이나 보상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포함된 진지하고 엄숙한 선언이다. 사과가 반인류적 범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용서와 망각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저질러진 범죄는 결코 잊힐 수 없지만 확실한 용서를 통해 피해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이언 부루마는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사과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일본의 근본적인 정치적 변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듯 장기적 전망에 기대는 것은 해결을 늦추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오히려 일본의 사과를 이끌어낼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다른 나라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그 어느 국가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정부나 미국 측 인사들이 일본에 최종적이고 완전한 사과를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미국의 진심 어린 사과는, 중국 톈안먼과 티베트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사과는 어디로 갔는가.

집단폭력 행위는 인류가 앓고 있는 질병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문명인으로서의 행동 가운데 하나는 각국 정부에 자기 잘못을 사죄하라고 인류의 이름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이미 저지른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시작이다. 타인에게 아픔을 준 데 대해 뉘우치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행동인 동시에 나아가 정책 변화의 길을 터줄 출발점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한 진정한 사과가 모여 비폭력과 국제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세울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이 엄숙한 책임감은 분명 인류 모두의 것이다.

멜 거토브 미국 포틀랜드주립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영어 원문은 https://globalasia.org/article/we-apologize-two-words-to-embrace-to-right-injustices/ 참조)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 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 아래 아시아 지역의 주요 현안에 대해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 구실을 담당한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년 9월 23일자 100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