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피로’ 위험수위]<上>‘디지털 노예’가 된 직장인
그러나 영화가 시작된 후가 문제였다. 스마트폰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나가서 전화를 받고 싶었지만 만석에 좌석도 통로와 거리가 먼 중간 자리였다. 마음이 불안해져서 스마트폰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환한 불빛이 새어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걱정이 됐다. ‘어차피 지금은 근무시간도 아니니까 우선 영화를 보자’며 스마트폰 전원을 꺼두었다.
영화가 끝난 뒤, 스마트폰을 켜보니 예상대로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 강 씨는 “늦은 시간까지 상사가 보내는 업무 메시지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토로했다.
“이것 하나만 보내 달라는데 잠깐 그것도 못 하냐” “아무리 휴가를 가도 연락은 되게 전화기는 켜놓아라”는 말에도 직장인들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올해 5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스마트폰 메신저를 사용하는 직장인 73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응답자의 68.5%가 ‘업무시간 외에 모바일 메신저로 업무 연락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연락을 한 사람(복수 응답)은 직속 상사(70.2%), 소속 팀 동료(41%), 거래처(27%), 타 부서 직원(26.2%), 최고경영자(17.3%), 소속 팀 후배(12.1%)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세기의 가장 큰 기업경영의 변화로 ‘스마트 워크(smart work)’가 예측된 적이 있다. 몸은 회사에 없어도 업무가 가능해져 인간이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갖게 된 지금, 직장인들은 오히려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몸이 회사 건물을 떠나도, 업무는 24시간 언제 어디서건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여가시간에 잔업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메신저 서비스 회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오히려 사람을 더욱 메신저에 얽매이게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카카오톡의 경우 메시지를 읽으면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다. 네이버 ‘라인’도 상대방이 읽으면 ‘읽음’이라는 표시가 뜬다. 메시지를 읽었는데도 왜 답변이 없느냐는 추궁이 가능한 셈이다.
김영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은 “요즘 회사는 새로운 화법과 언어로 노동시간을 늘리려고 애쓴다”며 “기술과 자본의 결합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를 옥죄고 있다”고 설명했다. 3년 전만 해도 인트라넷을 사용해 회사 정보를 보려면 직접 사무실에 가야 했지만 이제는 클라우드 시스템, 사물인터넷 기술이 보편화돼 언제 어디서든 일처리를 할 수 있게 됐다. 택배기사건, 보험설계사건 태블릿PC 하나만 들면 모든 업무가 가능해졌다.
○ “스마트폰 활용한 퇴근 후 지시는 초과근무”
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업무시간 외 지시는 초과근무로 인정해 달라는 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럽의 일부 기업 노조에서는 명시적으로 계약서에 금지 문구를 넣기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할 수 있으며 이 또한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BMW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근무시간 외에는 ‘전화를 받지 않을 권리’를 사규로 보장하고 있다.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한 피로 누적을 줄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도이체텔레콤이나 스마트폰업체 블랙베리 역시 퇴근 후의 e메일, 전화, 문자메시지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내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전화번호만 알아선 문자를 보낼 수 없고 영문으로 된 복잡한 ID를 알아야 한다. 스팸문자를 막기 위한 일종의 장치지만 개인적으로 알려주기 전까지 번호만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어려운 셈이다.
인터뷰에 응한 직장인들은 “단체대화방이 업무와 상관없는 부분까지 강박을 준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잠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메시지를 제때 확인하지 못할까 불안하다는 것. 20개씩 쌓인 메시지를 확인하다 보면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장승연(가명·31·여) 씨는 “상사에게 주목을 받기 위해 떠도는 ‘찌라시’(사설정보지) 내용이나 연예인 가십을 올리는 경우도 있고, ‘정보’라는 것들도 다른 부서의 실수담처럼 부정적인 걸 경쟁적으로 올리는 사례가 많아 조직문화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