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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의 정치해부학]‘공천학살’을 되풀이하잔 말인가

입력 | 2015-10-02 03:00:00


박성원 논설위원

2012년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의 친이(친이명박)계 의원들은 추풍낙엽 신세였다. 20명 안팎의 서울 친이계 가운데 공천 관문에서 살아남은 의원은 5명에 불과했다. 18대 총선에서 이명박(MB) 바람을 타고 당선됐던 초선들은 새로 들어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의 공천심사위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했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가 공천혁명을 위해 내놓은 비장의 무기는 ‘여론조사로 현역 의원 하위 25%를 공천 배제한다’는 컷오프 룰이었다.


‘전략공천’은 없다



여야 대표가 잠정 합의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놓고 청와대와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이 결사반대를 하는 이유는 2012년의 경험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당권을 쥔 김무성 대표가 ‘듣보잡’ 같은 ‘전화 오픈프라이머리’ 방식으로 청와대와 친박들의 영향력을 제거·차단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안심번호 전화공천제로 현역 의원을 대부분 재공천해 물갈이를 최소화하고 김 대표 자신의 대권 입지 강화에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시각이다.

친박 의원들도 안심전화번호의 문제점에 대해 줄줄이 열거하며 “안심할 수 없는 번호다. 당원이 국민의 대표자를 선출해 국민의 심판을 받는 정당정치, 책임정치에도 어긋난다”고 비판한다. 김 대표가 제기한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명분에 대해서도 “국민이 언제 정치권에 공천권을 달라고 했느냐”고 반문한다.

일부 친박은 새정치민주연합이 20%까지는 당에서 후보자를 단수로 지명하는 ‘전략공천’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점을 강조하며 은근히 전략공천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임기 말 국정 장악력과 퇴임 후를 위해 최소 50명가량은 끝까지 배신하지 않을 ‘박근혜표 직할부대’가 필요하다는 논리도 등장한다. 일부 친박 핵심 인사는 벌써 배지를 달아주겠다고 구두 계약한 인사들이 적지 않다는 마타도어성 해석까지 나온다.

하지만 “전략공(公)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략사(私)천’이 있을 뿐이다”란 말이 있다. 전략공천이란 지금까지 소수 권력자들이 물갈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사람을 꽂아 넣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공천학살’에 악용된 게 현실이라는 얘기다. 과거 선거 때마다 이뤄져온 물갈이가 과연 국회를 얼마나 발전적 방향으로 바꿔왔는지도 의문이다. 유승민 파동 이후 청와대에 의한 대구 지역 현역 의원 물갈이설이 나돌지만 2012년 총선에서 대구 지역 12명, 특히 7명의 초선 의원을 유능한 인재들이라고 인정해서 공천장을 쥐여준 이가 박 대통령이다.


누굴 위한 공천권인가



김 대표는 어제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배수진을 쳤다. 그렇지만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례에서 보듯 김 대표를 향해 칼을 빼어든 박 대통령이 쉽게 이를 거둘 것 같지는 않다. 50%를 웃도는 대통령의 지지도와 ‘반기문 대안론’, 마약사위 파문 등으로 흔들리는 듯한 김 대표의 입지를 이용해 ‘김무성 끌어내리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는 전략공천을 배제하면서도 실제 공천에서 서로의 영향력을 적절히 배려하는 식으로 타협을 모색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럼에도 공천이 소수 권력자들의 밀실거래에서 좌우되는 후진적 정치구조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새누리당은 “국민이 언제 공천권을 달라던가”라는 식의 자폐적 인식에서 벗어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선진적 공천방식을 마련함으로써 야당에 대한 비교우위를 보여줘야 할 때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