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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한국 외교사 명장면]2009년 남북 비밀접촉 ‘백두 프로젝트’

입력 | 2015-10-03 03:00:00

‘임태희-김양건 라인’을 만든 건 숭례문 화재사건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8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해 남한을 찾은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원동연 아시아태평양위원회 실장(오른쪽에서 두 번째부터) 등 북한의 조문사절단을 접견하고 있다. 이때 김 비서는 이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 의사를 밝혔지만 이후 실무진 접촉과정에서 북측의 회담대가 요구 등의 문제가 불거져 결국 무산됐다. 동아일보DB

‘백두 프로젝트.’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 과정에 붙여진 코드명이다.

그해 10월 7일 싱가포르에서 이뤄졌던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사진)-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접촉은 이명박 정부에서 정상회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남북 협의였다.

두 사람은 정상회담의 시기와 장소까지 논의했다. 정부는 당시 정상회담을 위한 차관급 준비위원회까지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 주체가 통일부로 바뀐 그해 11월 7, 14일의 통일부-통일전선부 간 실무접촉에서 협의는 결렬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올해 펴낸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사자인 임 전 장관은 “싱가포르 접촉에선 북한이 정상회담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정상회담 협의가 깨진 전말을 놓고 논란이 남은 것. 정작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라인이 아닌 임 전 장관이 접촉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숭례문 화재가 만든 임태희-김양건 라인


임 전 장관에 따르면 그 시작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이던 2008년 2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탔다. 그 뒤 북한 군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재미교포 선교사를 통해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에게 숭례문 복원에 금강송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해 왔다. 임 당시 의장은 이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낸 권력 핵심이었다.

그해 3월 남북 관계는 개성에서 남북교류협력협의사무소가 철수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북한은 물밑으로 “남측에 금강송이 별로 없으니 금강산의 금강송을 통해 남북 화해의 물결을 만들어보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임 당시 의장은 통일부 국가정보원 문화재청 등 관계 부처에 이를 전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업은 무산됐다.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임 당시 의장의 대북 라인은 그때부터 본격화했다. 북한은 임 전 실장에게 이후에도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군부 통일전선부에서 번갈아 오던 메시지는 통전부 라인으로 정리됐다. 임태희-김양건 라인이 생긴 것.

임태희-김양건 라인은 각종 남북 교류 사업을 논의했다. 2008년 말부터는 이를 위한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졌다. TF 인사들이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 라인을 통해 협의했다.



“북의 임진강 무단 방류 유감 표명에 역할”

정상회담 협의에 대한 속도가 붙은 것은 2009년 8월 북한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을 보냈을 때였다. 조문단은 김기남 당 비서와 김양건이었다. 조문단은 임 전 실장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청와대 방문을 타진했다. 청와대를 방문한 김기남은 이 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 의사를 밝혔다. 이후 임태희-김양건 라인이 정상회담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9월 북한의 임진강 황강댐 무단 방류로 한국민 6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서도 임 전 실장 측은 통전부 라인을 통해 북한의 유감 표명 문구를 조율했다.

임 전 실장과 김양건의 대화 속도도 빨라졌다. 언론에 공개된 10월 싱가포르 접촉 이전에도 두 사람은 중국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고 한다. 10월 7일 싱가포르 접촉 때의 임 전 실장은 비선이 아니라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접촉 공식 임무를 부여받은 특사였다.



“이산가족 3만 명 만나야 쌀 30만 t 지원”

싱가포르 접촉의 내용은 언론과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싱가포르 접촉 뒤 개성에서 열린 통일부-통전부 간 비밀접촉에서 북한이 싱가포르 접촉 합의 내용이라며 “옥수수 10만 t, 쌀 40만 t, 비료 30만 t을 비롯해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고 썼다.

임 전 실장은 “김양건은 정상회담의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면 그에 상응하는 식량 지원이 가능하다고 우리 측이 제안했다는 게 임 전 실장 측의 설명이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의 상시 만남 등 상봉 정례화를 제안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이 실제 이뤄지면 쌀 30만 t을 지원할 수 있다고 먼저 얘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논의에 따르면 이산가족 1명이 가족을 만나거나 고향 방문을 하면 북한은 10t의 쌀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노무현 정부 때처럼 먼저 쌀 30만 t을 주는 게 아니라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응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기 때문에 퍼주기 논란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개발은행에 대해서도 싱가포르 접촉에서는 100억 달러 규모의 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하는 데 남측이 적극 지지해 달라는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북한이 싱가포르 접촉 이후 개성에서 왜 말을 바꿨는지, 그게 아니라면 정부가 싱가포르 접촉 이후 북한의 주장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 그 전말은 물음표로 남아 있다. 이후 남북 관계는 내리막을 걸었고 2010년 3월 북한은 천안함 폭침을 감행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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