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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여왕’ vs 찌질한 남자들

입력 | 2015-10-07 03:00:00

김무성, 오픈프라이머리 좌절… 유승민, 국회법 개정 실패
둘 다 피해자인 척하며 ‘여왕’ 대통령 탓이라지만 결국은 자기들이 자초한 것
친박도 전략공천 포기 않으면 대통령 狐假虎威하는 꼴




송평인 논설위원

제 잘못으로 승부에서 진 남자들이 패배를 인정하기 싫으니까 상대방을 절대 권력을 가진 ‘여왕’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해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 개헌 얘기를 꺼냈다가 꼬리를 내렸다. 가만 보니 그의 ‘특기’가 자신도 모르고 국민도 모르는 얘기를 꺼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접는 것이다. 추석 연휴에 느닷없이 들고나온 안심전화 공천제도 없던 일로 됐다. 그는 앞서 오픈프라이머리에 정치생명을 건다고 했다. 오픈프라이머리가 물 건너간 듯하자 ‘안심전화 공천제는 전화로 하는 오픈프라이머리’라고 우겼다.

오픈프라이머리도 안 되고 안심전화 공천제도 안 되자 그는 ‘그래도 전략공천은 없다’고 나왔다. 그러면서 ‘우선공천은 가능하다’고 한다. 전략공천은 우선공천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사고가 뒤죽박죽이어서는 여왕이 아니라 여종과 싸워도 진다. 오픈프라이머리는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나 그의 정치생명은 그대로다. 그 정도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말에 무게가 없는 건 사실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이 대통령에 의해 거부됐을 때 대통령을 향해 공개적으로 ‘사죄합니다’ 한마디를 한 것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거부권 예고에도 불구하고 입법을 강행했으면 재의(再議)를 추진해 다시 통과시키든가, 그럴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사퇴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내대표를 계속 하겠다는 모습이 구차했다.

묘한 점은 김 대표나 유 전 원내대표가 이런 사태를 자신들의 잘못으로 보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을 여왕으로 만들어 그쪽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가 사퇴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외친 것은 젊은 사람들 말로 피해자 코스프레(피해자인 척하기)다. 김 대표가 황당한 의제를 불쑥 꺼내 당내 분란을 만들어 놓고는 대통령과의 분란은 당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참는다는 식으로 거둬들이는 것 역시 ‘피해자인 척하기’다. 김 대표는 얼마 전 ‘오늘까지만 참는다’고 했는데 그 뒤로도 계속 참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참게 될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여왕 대 공화국의 대립이 아니라 여성 대통령 대 찌질한 남자들의 대립이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에서 대통령이 당권까지 쥐고 있으면 제왕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친박(親朴) 의원들은 원내에서 소수파다. 당권도 쥐고 있지 못한 대통령을 여왕으로 부르는 것은 희화화에 가깝다. 최근 정치사를 보면 당권을 쥐지 못한 대통령은 언제든지 당에서 축출될 위기에 놓였다. 실제 여러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자기 의사에 반해 당에서 나왔다. 박 대통령은 단지 자신의 높은 지지율 때문에 이런 위기를 피하고 있을 뿐이다.

김 대표와 유 전 원내대표의 ‘피해자인 척하기’가 먹혀든 것은 언론의 프레임과 무관치 않다. 언론은 정당이 대통령과 싸울 때 대통령이 강자라고 여기고 비판하는 관성이 있지만 이 경우는 정당 쪽이 허술했다.

친박의 행태도 박 대통령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 같아 꼴사납다. 전략공천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에서 국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전략공천을 폐기하는 것이 옳다. 전면 폐기가 힘들다면 최소한 나가기만 하면 당선되는 서울 강남권과 대구 등에서 전략공천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는 곳은 경기 성남시 분당갑 지역이다. 이곳도 새누리당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곳이다. 지난 총선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종훈이라는 사람이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나중에야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경제학 박사로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측의 국가미래연구원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 후보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 씨가 나왔다. 청와대에서 국민 세금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나와서 의원 출마하는 사람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느 쪽도 찍고 싶지 않았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집권할 때 ‘보수당에 남자는 대처뿐’이라는 농담이 오갔다. 지금 우리나라 집권여당이 꼭 그런 꼴이다. 당당한 남자들이 안 보인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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