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논설위원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요즘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선거제도 개편을 요구하는 것이 2003년 당시 대통령과 묘한 데자뷔를 일으킨다. 노 대통령은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 또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조건으로 총리직을 한나라당에 넘겨주는 대연정(大聯政)을 구상했다. 문 대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합의해주는 반대급부로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을 기대했을 것이다.
의석수 결정 없이 꼼수만 궁리
이 때문에 여야는 선거구획정위에 건네줘야 할 지역구 및 비례대표 의석수를 정하지도 못했고, 13일까지 국회에 선거구획정안을 제출해야 하는 획정위는 몸이 달아 자체적으로라도 지역구 및 비례대표 수를 정해보겠다고 나섰다. 여야는 제 할 일도 못하면서도 획정위에 대해 “인구 감소로 통폐합이 불가피한 농어촌 의석수의 감소는 안 된다”고 압박하며 농어촌에 다른 시군구의 일부를 떼어 붙여 구제해주는 게리맨더링까지 거론하고 있다. 지난해 6·4지방선거 때는 기초선거 무(無)공천을 ‘새 정치’의 상징으로 천명했던 새정치연합이 정작 당내 반대론에 밀려 방침을 선회하는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험한 설전을 벌였다.
선거제도보다 어지러운 ‘룰 전쟁’은 당내 후보 공천 규칙을 둘러싸고 늘 벌어졌다. 지금 새누리당의 비박(비박근혜)과 친박(친박근혜)들이 국민공천과 전략공천을 놓고 싸우고 있다면, 2012년 총선 때는 ‘25% 컷오프 물갈이’를 놓고 친박과 친이(친이명박)들이 싸웠다. 그해 대선에선 정몽준 이재오 의원이 요구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놓고 싸웠다.
선거 때마다 룰 전쟁이냐
새정치연합은 이번에 혁신위의 공천안을 놓고 친노(친노무현)와 비노가 싸우지만 지난 총선과 대선에선 모바일 경선의 공정성을 놓고 싸웠다. 오로지 자기 계파의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선거 때마다 새로운 룰을 들이대며 싸우는 통에 가치와 비전의 경쟁은 실종되고, 유권자들에게 대체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자기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미국의 선거제도나 후보 선출 규칙은 선거 때마다 바뀌지 않는다. 독일에선 주요 정당들의 후보 선출 절차까지 연방법에 규정돼 있다. 선거 때마다 ‘룰의 전쟁’을 벌이는 나라의 정치인들은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위인설법(爲人設法) 해달라고 조르는 불량선수들과 뭐가 다른가.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