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막으면 행동 나설것” 美에 초강수 美 합참 기밀문서로 본 당시 상황
1953년 6월 1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반공포로가 전격적으로 석방되는 모습(위쪽 사진). 미국은 반공포로의 강제 송환을 요구하던 북한을 의식해 휴전협상 결렬을 막으려고 반공포로 석방에 반대했다. 아래쪽 사진은 6·25전쟁 도중 국군과 미군에 붙잡힌 뒤 한국 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 위해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너고 있는 반공포로 제1진의 모습. 동아일보 DB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결코 휴전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대통령이 취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결과적으로 휴전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를 반전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해 최초로 공개하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일방적인 포로 석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미국의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필요하면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겠다”며 당당하게 따졌다.
양보할 수 없었던 국민의 ‘구출’
반공포로 석방이 이뤄진 1953년 6월 18일에 작성된 미국 합동참모본부 기밀 해제 문서. 한국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사실을 최초로 보고한 문서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 지시였다는 내용은 파악하지 못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한국 정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포로 중에 한국 출신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에는 북한군이 남침해 내려오면서 강제로 끌고 간 한국 국민이 3만5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결국 유엔군은 북한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휴전과 동시에 즉시 석방한다는 조항을 협정문에서 삭제했다. 자칫 무산될 수도 있었던 정전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타협한 것이다.
한국의 포로수용소에서는 휴전에 반대하며 연일 폭동이 이어졌다. 반공포로 석방이 단행되기 하루 전인 1953년 6월 17일 오전 11시에 작성된 미 합참 기밀문서에 따르면 “포로수용소에서는 연일 정전협정 반대 집회가 열려 최루가스로 강제 해산해야 했다”고 적고 있다. 또 “6월 16일 약 2000명의 학생과 1000명의 상이군인 및 예비역들이 마산에 집결해 정전협정 반대 행진을 했다. 서울에서는 동시에 여덟 곳에서 집회가 벌어졌다. 부산에는 아침부터 2000명이 모여 집회 중이다. 대구에서는 6월 17일 오후 1시부터 5000명의 피란민이 통일 행진을 할 예정이다”라고 쓰여 있다.
휴전에 대한 국민 반발이 큰 상황에서 억울하게 포로가 된 우리 국민까지 북한에 끌려가게 놔둘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이승만 정부의 판단이었다. 이 대통령은 6월 17일 오후 6시 한국군 제2군단 사령부에서 맥스웰 테일러 미 8군사령관 등과 회동한다. 반공포로 석방 가능성을 떠보기 위한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대화 중간 중간에 정전협정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하며 “집단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집단행동’이란 반공포로 석방, 전작권 환수 등을 포함한 실력행사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반발에 “전작권 다시 가져오겠다” 초강수
원용덕 헌병사령관은 6월 18일 이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 반공포로를 석방한다. 포로 3만5698명 중 2만7388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 대통령은 석방이 단행된 지 4시간 후인 오전 6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미군은 즉각 항의 서한을 보내고 강력 반발했다. 6월 18일 오후 6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 대통령에게 넘겨받은 전작권을 언급하며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1950년 여름 대통령님(이승만)은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북한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달라며 대한민국의 모든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권을 부여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번 사태는 나의 권한에 대한 명백한 위반입니다. 나는 대통령님이 약속하신 것을 어긴 것에 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무모한 행동이 가져올 극단적 결과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그토록 희생하면서 이룩해 온 결과들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클라크 사령관의 유감 표명에 이 대통령은 오히려 더 강수를 들고 나왔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합의대로 한국군을 군사분계선에서 2km 이남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작권도 환수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나는 몇 차례고 당신에게 이 무고한 대한의 자녀들을 더 이상 그 비좁은 곳에 구금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전협정 후 남북 양측이 2km씩 후퇴하기로 돼 있는데 나는 한국군이 그렇게 하지 않을까 봐 걱정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당신으로부터 한국군의 전작권을 가져올 겁니다. 각자 나름의 상황이 있는 것이고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합니다.”
이 대통령은 이 서한 말미에 “유엔군이 후퇴하고 한국군이 자리를 지킬 경우 그 틈으로 적이 쳐들어 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쓰고 있다. 정전협정을 지키는 대신 확실한 안전보장을 해 줄 것을 압박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뜻하지 않은 강수에 군사동맹 체결에 미온적이던 미국도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후 한미 양국은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보름 전인 7월 12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