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 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 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우리가 제정신이라면, 여자들이 남자화장실을 청소하고, 온갖 건물과 공원에 홈리스들이 넘치고, 마르고 늙은 몸들이 폐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풍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한다.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순진한 소리다. 하지만 ‘순진’ 없이 무얼 해결할 수 있나.
최악의 상황에 놓인 구성원들을 방치하고도 나라란 것이 어딘가로 굴러간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세금은 걷어서 무엇에 쓰나. 이 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왜 이 땅 이곳에서 여든이 넘도록 이렇게 거미처럼 그을려가며 신문지를 모으고 박스를 줍고 있나. 온종일의 노동이 왜 만 원도 되지 않는가.
저 삼성테레비와 싱크대와 냄비와 굽은 허리와, 꼭 짜 놓은 걸레의 문장 다음에 무엇이 와야 할까. 설움 많은 시인의 눈물이 속절없이 또, 먼저 와 있다. 예수여 부처여 오라. 무정하고 무책임한 국가여, 오라. 그리고… 언젠가 저 ‘졸아든 팔순’이 될지도 모를, 우리 모두여 오라.
이영광 시인